인스턴트커피도 감사하다며 환하게 웃는 곽기순(77·사진)씨의 직업은 아나운서다. 소출력 공동체 라디오 방송국인 마포FM ‘행복한 하루’라는 노인 프로그램에서 ‘이야기가 있는 풍경’ 코너를 진행하고 있다. 곽씨는 프로그램 진행뿐 아니라 배우, 인형극 사회자, 문화재해설사 등 다역을 맡고 있다. 건강하지 않으면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못했을 거라는 그는 지난해 1월 탑골공원에서 독립문까지 장장 5시간에 이르는 걷기대회를 완주할 만큼 건강하다.
-어떻게 아나운서로 활동하시게 됐나.
“5년 전 마포복지관 게시판에 아나운서 공고가 걸려 있었다. 얼른 찾아가서 하겠다고 했다. 젊었을 때 패션디자인을 하면서 해보고 싶던 일이었는데 기회가 좋았다.”(패션일을 해온 그답게 자신의 오래된 옷을 리폼하기도 한단다)
-진행하고 계신 ‘이야기가 있는 풍경’에 대해 소개해 달라.
“나와 같은 7080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풀어간다. 내 일상 속에 있었던 소소한 일도 방송 소재가 된다. 종로에 있는 허리우드극장이나 서대문의 청춘극장 같은 곳에서 노인들을 위한 영화를 개봉하는데 그런 문화 소식을 전한다. 65세 이상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전시도 많은데 우리 세대는 문화와 좀 동떨어져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또 누구나 즐겨 들을 수 있는 내용을 위주로 방송하기 때문에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딱딱한 소재는 피하는 편이다.”
-방송 소재는 주로 어디서 찾으시는지.
“얼마 전 방송인 김제동씨의 취미가 ‘신문 스크랩’이라고 해서 저런 것도 취미로 쳐주나 의아했었다. 사실 그건 내 취미인데(웃음). 소재를 신문에서 얻는 경우가 많다. 평소에 책도 많이 읽는 편이다. 신문은 오리고, 책은 메모하면서 읽기 때문에 내가 본 것은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을 정도다.”
-배우로도 활동하셨다.
“‘도깨비 불’이라는 25분짜리 단편영화에 출연했다. 아직 개봉은 안 했다. 용왕의 딸로 나왔는데, 인간과 사랑에 빠져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 젊은 여자에서 할머니로 변한 여주인공 역이다. 상대 남자 배우가 20대 젊은이인데, 내 볼을 안타까운 듯 쓰다듬는 장면을 촬영할 때 어려워한 에피소드가 기억이 난다. 촬영 당시 지방선거철이라 유세 스피커 소리 때문에 힘들었던 기억도 있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일을 하신다. 그 힘의 근원은 무엇인가.
“고궁을 견학하는 아이들을 지도하는 서울시문화재해설사와 초등학교를 돌며 영어 인형극을 진행하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어느 노교수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92세의 교수가 잔치를 열어준 제자들에게 ‘이렇게 오래 살 줄 알았다면 60대에 정년퇴임하지 않았을 것이다. 너희는 나처럼 살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노년은 죽음만 기다리는 시기가 아니라는 ‘신노년’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인생을 건강하고 멋지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