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디자이너 1호로 한국의 미를 세계 무대로
남성 디자이너 1호로 한국의 미를 세계 무대로
  • 정필주 / 여성신문 객원기자
  • 승인 2010.08.20 11:32
  • 수정 2010-08-20 11: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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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성·언론 친화력도 디자이너 역량으로 평가돼야
‘앙드레 김’의 세계 브랜드화는 여전히 미결 과제로

 

75세를 일기로 타계한 앙드레 김에 대한 사회 각계의 추모 열기가 뜨겁다. 정부는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며 “한국의 패션을 세계에 알린 패션 디자이너의 업적을 기린다”고 밝혔다.

앙드레 김과 그의 패션(사진)이 시사하는 의미는 크게 세 가지다. 우선 시대성이다. 1960년 국제복식학원의 유일한 남성 수료생이자 1962년에 자신의 의상실을 연 앙드레 김은 당시 패션디자이너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에 남성 디자이너 1호로 자리매김을 했다. 패션디자이너 장광효씨는 앙드레 김을 일컬어 “1세대로서 역할을 완수한 선구자”라고 평했다. 장씨는 “디자이너라는 것을 어렵게 볼 수 있는데 그 분은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국민이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게 했고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 획기적으로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둘째로는 앙드레 김 패션이 ‘한국의 미’를 해외에 알렸다는 점이다. 패션디자이너 박동준씨는 “그 분은 당시 아무도 한국을 패션으로 알린다는 생각을 안 할 때 지속적으로 실천을 한 분이다. 민간 외교사절 디자이너라고 할까”라고 말한다. 실제로 앙드레 김은 1966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파리에서 컬렉션을 개최했고, 같은 해 미국 워싱턴에서 국제의상발표회를 열었다. 이어 이탈리아 대통령과 프랑스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고, 2006년에는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사원에서 세계 최초로 패션쇼를 열어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등 줄곧 한국의 미를 세계에 알렸다는 평을 받았다.

그렇지만 앙드레 김만큼 한국 패션계에서 논쟁의 중심에 선 인물 또한 드물다. 특히 한국 패션의 대명사로서 앙드레 김의 ‘한국적 미’에 대한 의문은 지금까지도 현재 진행형이다. 이에 대해 디자이너 권자영씨는 “앙드레 김 패션이 자신만의 색깔을 확실히 보여줬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표현 방법에 있어서 오방색이라든지 특정 문양으로 한국적인 패션이 한정된 것은 아닌지 하는 아쉬움이 있다. 전통에서 문양을 찾는 것은 바람직한 시도지만 사람들이 한국적인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좀 더 다양한 차원의 토대를 다져가는 과정이 있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실제로 앙드레 김의 패션 작업에 대해 대중적 인기와는 달리 패션계의 평가는 다소 엇갈린 편이다. 특히 디자인의 큰 변화 없이 대중 스타를 모델로 세운 패션쇼를 반복하는 것에 대해선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장광효씨는 “앙드레 김의 타계가 그의 패션 세계의 발전 과정에서 본다면 너무 일렀다며, 이는 브랜드로서의 ‘앙드레 김’을 명품 브랜드 샤넬처럼 키우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실제로 세계적인 브랜드인 샤넬이나 루이뷔통 또한 그 디자인에 있어 ‘새로움’보다는 자기만의 디자인을 고수함으로써 그 명성을 유지해가고 있는 것을 볼 때, 앙드레 김의 ‘패션’이 발전이 없었다고 논하기엔 아직 이른 것일 수 있다. 물론 그가 세계에 선보인 ‘앙드레 김’은 이미 한국적 미의 대명사로 자리매김 했기에 이를 어떻게 발전적으로 극복하고 새로운 한국적 미를 선보일 것인가는 한국 패션계의 현안이자 숙제로 남게 됐다. 

마지막으로 앙드레 김 패션은 ‘패션디자이너의 역량과 실력은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앙드레 김은 대중스타적이고 언론 친화적이었다는 평을 곧잘 듣기 때문이다. 이번 장례식에 참석한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디자이너들보다 오히려 대중스타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에 대한 비판의 근거로도 곧잘 쓰였던 이런 점에 대해 오히려 원로 디자이너 문경희씨는 ‘정치적 친화력’도 디자이너의 역량임을 성공적으로 보여준 사람이 앙드레 김이었다고 말한다.

“70년대에 어느 주간지 사진부장이 나더러 앙드레만큼 매스컴을 천재적으로 이용하는 사람은 없다고 그러더라. 예를 들어 (앙드레 김은) 큰 행사 때 파티 테이블을 하나 사서 외국 사절단을 자기가 다 초빙했다. (앙드레 김은) 돈이 넉넉하지 않을 때부터 그렇게 해왔다. 그러면서 영어도 늘고 상류층 외교관과 교제를 다져가며 그쪽으로도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런 머리가 보통 디자이너들에게는 없었다.”

앙드레 김의 패션 역량을 단지 작품에 드러나는 패턴이나 디자인에서만 찾아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다. 언론을 활용할 줄 아는 그만의 자기 PR 방법은 자신의 패션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필수적인 도구였던 것이다.

이처럼 앙드레 김에 대한 다양한 평가와 패션계에 그가 남긴 여러 과제는 어쩌면 패션계의 후배 디자이너들 그리고 한국 문화계의 젊은 세대가 끌어안아야 할 그의 유산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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