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장을 찾은 배우 최불암씨는 “고인은 디자이너로서 치장하셨지만 늘 검소했다”고 말하며 “외국 대사들에게 친숙하게 대하며 한국을 알리셨고, (패션쇼로 한국을 알리는 데) 당신 재산도 다 내놓은 애국하신 분”이라고 회상했다. 역시 장례식장에서 김병찬 아나운서는 “유명인들은 자신에게 불리한 부분을 숨기는 경우가 많은데 앙드레 김 선생님은 그러지 않으셨다”고 말했다. “얼굴에 분칠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자신이 얼굴이 커서 혐오감을 줄 수 있기에 분칠하고 눈썹을 그린다’고 하실 만큼 솔직했던 분이셨다”고 회고했다.
1960년에 앙드레 김과 함께 국제복장학원에서 1기 수료생으로 디자이너 수업을 받은 원로 패션디자이너 문경희씨는 전화 인터뷰에서 “앙드레는 화려하게 매스컴을 타서 그렇게 안 보일 수 있지만 워낙에 착하고 성품이 좋고 또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운을 뗀 뒤 “나는 어딜 가나 앙드레의 미적 감각, 그리고 노력하는 자세를 칭찬해왔어요. 다만 너무 튀니까 (다른 사람들이) 질투·시기하기도 하고 개성으로 인정해주지 않았다”고 고인을 회상했다.
유명해지기 전의 앙드레 김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지인 중 한 명인 그는 “앙드레는 패션인생 50년 중 30년은 고생하며 살았어요. 물질적으로도요”라며 고인의 ‘신인 디자이너’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60년에 복장학원 다닐 적에 다른 사람들은 헝겊으로 미싱 연습을 할 때 앙드레는 헝겊을 살 돈이 없어서 원고지에다 미싱 연습을 했어요. 원고지에는 줄이 쳐져 있잖아요. 그리고 학원비를 안 내고 장학생으로 학원 일을 도와주면서 공부한 사람이에요. 그렇게 어렵게 지내면서도 항상 깨끗한 것, 예쁜 것을 좋아했어요. 특히 분홍색을 그렇게 좋아했고요.”
수줍음이 많아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말 한 마디 못 건넨 남학생으로 앙드레 김을 기억하는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아서 자기 일에 올인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머리가 좋은 사람이고요”라고 말하며 앙드레 김을 추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