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역사 전하려 뜁니다”
83세 고령에도 각종 기록작업·기념 상영회 참여
노가미씨는 한국영상자료원과 일본국제교류기금이 주최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탄생 100주년 특별전’ 개막식 참석을 위해 배우인 나카다이 다쓰야씨와 함께 한국을 찾았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활약할 수 있는 원동력에 대해 묻자 “쉬운 길을 골라 가고 있지요. 별로 건강하지 못해요. 나이는 어쩔 수가 없네요. 이제 ‘곧’이지요”라며 유머로 응수한 그는 한편 현재 일본 영화에 대한 쓴소리도 서슴지 않았다.
노가미씨의 명함에는 ‘구로사와 아키라 창작노트-7인의 사무라이’ 편집위원이라는 직함이 적혀있다. 현재 구로사와 감독 탄생 100주년을 맞아 최초로 출간될 구로사와 아키라 창작노트의 작업에 주력하는 한편 세계 각국에서 개최 중인 상영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지난 해 베니스영화제는 구로사와 특별전을 열었고 앞으로도 브라질과 로마 등에서도 상영회가 예정되어 있다.
“함께 했던 사람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면서 당시의 정황이나 사실을 모두 알고 있는 제가 제대로 남기고 전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 몇 년 더 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일본 영화의 역사를 남긴다는 사명감으로 관련 자료들을 정리하는 일에 매진할 계획입니다.”
노가미 데루요씨는 독일문학가이자 사회주의 사상연구가였던 전 고베대학 교수 노가미 겐(필명 니이지마 시게루)의 딸로 도쿄에서 태어났다. 전쟁 전 시골 대학의 도서관 사서로 일했던 그는 전쟁 후 도쿄로 와 공산당 신문을 인쇄하는 일에 참여하며 신문사와 출판사에서 근무했다. 출판사 근무 당시 스승이었던 이타미 만사쿠 감독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인 이타미 주조(현 영화감독)를 돌보기 위해 교토로 이주, 다이에이 영화사에 입사했다.
“돈을 벌어야 해서 영화사에 들어갔지만 당시 영화계에서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스크립터와 헤어디자이너 정도밖에 없었어요. 영화에 대해 아는 것은 없었지만 촬영장의 홍일점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인기를 한몸에 받았죠.(웃음) 전쟁 직후의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이 밖에 나가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생각해요.”
입사 이듬해 구로사와 감독의 ‘라쇼몽’에 참여하게 된 그는 쇼치쿠 영화사에서 찍은 ‘백치’를 제외한 마지막 작품까지 모든 작품의 촬영장에 함께하며 기록, 편집뿐만 아니라 구로사와 감독 팀의 전반적인 일들을 맡아서 했다.
노가미씨는 구로사와 감독과의 작업 외에 직접 작가로도 활동, 1984년 자전적 이야기에 픽션을 가미한 소설 ‘어머니’(母べえ)로 요미우리 여성 휴먼·다큐멘터리대상의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8년 영화로도 제작되어 크게 히트한 ‘어머니’는 수상 당시의 타이틀 ‘아버지에의 레퀴엠’에서 볼 수 있듯 전후 사상범으로서 고초를 겪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아버지는 제 인생에 큰 영향을 주신 분입니다. 독일문학가면서 유물론연구회 활동을 했던 탓에 어려움을 겪으셨지요. 이 작품은 어린 시절 옥중의 아버지와 주고받은 편지가 바탕이 됐습니다. 당선될 때까지 살아계셨다면 효도할 수 있었을 텐데 금방 돌아가셔서 안타까웠죠.”
일본 영화의 황금기를 세계적인 거장의 곁에서 보낸 노가미씨는 현재 일본의 영화를 묻는 질문에 “요즘 영화인들은 재능이 없다”며 날카로운 비판을 던졌다.
그는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을 가장 좋아한다며 “‘살인의 추억’은 일본에서 이미 고전이 된 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 영화에는 지금 일본이 잃어버린 에너지가 있다”면서 앞으로 더 활발한 한·일 문화 교류가 이뤄지길 희망했다.
아픈 과거로 인해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을 원망하고 있을 것이고 일본인 또한 그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거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욘사마 붐으로 인해 이렇게 순식간에 일본 전체가 뒤바뀔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습니다. 일본인들이 이렇게까지 무언가에 열광하고 변화하는 일은 드문 것이라 지금까지 양국의 관계 개선을 위한 그 어떤 노력보다 영상이 가진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보여준 증거였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