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언론 앞장서 전쟁위기감 부추겨
“리스트는 없지만 파일은 있다”는 말장난
‘정권안보용’남북관계는‘적대적 공생관계’

“리스트는 없지만 파일은 있다.”

무슨 탐정소설 같은 이야기인가. 황장엽씨의 기자회견을 본 국민들은 착잡했다.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황씨는 “북한은 김정일의 개인왕국” “북한은 한번은 전쟁을 일으킬 것”, “5분내에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수 있을 것”, “그간 접촉한 남한인사가 많다”, “북한이 핵무기를 갖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전쟁이 나면 일본까지 미사일을 쏠 수 있어 미국이 개입하기가 힘들 것”, “가미가제식으로 미군순양함에 폭탄공격을 가하면 미국도 어쩔수 없을 것”등 밑도 끝도 없는 말들을 쏟아냈다. 게다가 “이 말만은 믿어달라”며 남한에서의 “차제에 시위와 파업이 무엇이냐”며 목소리를 높이기까지 했다.

황 씨가 중국에서 망명의사를 밝혔을 때 북한에 대한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김일성종합대학의 총장을 지내고 현재 노동당의 국제담당 비서가 아니던가, 게다가 언론보도에 의하면 그 무시무시한 ‘주체사상’의 창시자라고 하지 않던가. 어떻게 그런 거물이 ‘미제의 주구’인 남한으로 망명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예상대로 곧 북한이 붕괴하는 것이 아닌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마음을 졸이며 그가 무사히 한국으로 들어오기를 바라지 않은 사람이 있었을까.

그러면서도 너무 오래 속아온터라 황 씨가 ‘민족통일’을 위해 남한행을 결심했다는 발표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 올초부터 나라를 들썩였던 안기부법, 노동법 날치기통과에 따른 국민적 저항, 그리고 잇따른 한보사태를 덮어버리려는 고도의 수작일 수도 있다는 의구심도 있었다. 드디어 중국에서 필리핀을 거쳐 우리 나라로 들어오자 국민들은 어느 정도 안도했다. 그러나 또 다른 걱정이 나타났다. 그간 일부 언론에 거론되던 ‘황장엽 리스트’의 존재여부였다. 우리는 자유당정권과 유신정권 이래 역대 정권이 적당한 시기마다 국민의 ‘레드 컴플렉스’를 빌미 삼아 민주인사들에게까지 위해를 가해 왔던 현실을 너무나 생생히 보아왔기 때문이다.

아니나다를까. “리스트가 있다 없다”를 거듭하더니 결국은 “없지만 있을 수 있다”로 결론이 났다. 6개월 여 조사 끝에 검찰의 발표는 리스트는 없지만 파일은 있다는 것이다. 일반 국민들은 리스트와 파일이 어떻게 다른지도 모른다. 결국 무언가 앞으로 있을 것이라는 예감만 들 뿐이다. 항상 선거 때면 그래 왔으니까.

정부와 언론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기자회견 후 국방부는 ‘전쟁도발대비 긴급점검단’을 구성하겠다고 서둘렀다. 국무총리실은 그런 계획이 없다고 부인했다. 도대체 총리실과 국방부 중 어디가 상부단체인가. 6·25이후 한반도는 휴전상태다. 그간 정부는 북한의 도발을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해오고 있다고 큰소리치면서 세금부담을 강요해왔다. 그래놓고 갑자기 ‘도발대비 긴급점검’이라면 지금까지 점검도 하지 않았다는 것인지. 언론들은 한술 더 떠 해오던 대로 한반도 지도에 대치전력을 그려놓은 가상 전쟁시나리오를 펼쳤다. 어떤 신문은 “전쟁은 1%의 가능성이 전부다”는 논지를 펴면서 ‘유비무환’을 재강조했다. 우리나라 국민치고 전쟁의 공포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도 모자라 정부와 언론은 수시로 공포분위기로 내몬다. 이번엔 오히려 국민이 현명했다. 라면과 양초사재기가 없었으니 말이다.

국민은 각오가 되어 있으니 남은건 정부의 자세다. 남북대치상황은 변하지 않았는데 다시 전쟁위기설을 부추긴다면 그건 선거용으로 보인다. 소위 남북관계를 정권유지를 위해 이용하려는 유혹이다. 정당성이 결여된 역대정권이 써먹은 ‘정권안보용’이라고도 한다. 어느 학자는 이러한 남북관계를 ‘적대적 공생관계’라고 지적한 바있다.

6개월여를 수사해온 안기부가 앞으로 더 조사할 것이 있다면 무능한 것이다. 무능이 아니라면 87년 대선 때의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이나 지난해 총선때의 ‘북풍’과 같이 남북간의 사건을 여당에게 유리하게 몰아갈 가능성이 있다. 수사당국은 제발 민족문제를 놓고 더이상 장난을 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정권은 짧지만 민족은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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