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근석에 새겨진 ‘마을지킴이’로 악귀 막고 다산 염원
남근석에 새겨진 ‘마을지킴이’로 악귀 막고 다산 염원
  • 이태호/ 전남대 교수, 미술사
  • 승인 2017.10.11 11:42
  • 수정 2017-10-11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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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주천의 호기리 장승과 화순 벽나리 민불

남근석과 같은 성신앙적 조형물은 그기능이나 의미에서 장승 혹은 벅수와 유사성을 지닌다. 장승과 남근석이 함께 세워져 동제의 중심이 되거나 마을 지킴이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들은 솟대(혹은짐대)와 함께 그 기원을 대체로 농경문화와 계급사회가 뿌리를 내린 청동기시대 거석문화의 한 형태인 선돌에서 찾는다. 선돌(立石)은 경계를 표시하거나 성역임을 나타내기 위해 설치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마한의 소도(蘇途)로 발전하고, 불교사회인 신라-고려시대에 사찰의 입구 내지 영역표시석으로 세웠던 것이 장생(長生)이다. 조선시대에는 지역과 거리 표시 용도로 나무로 만든 장승(長丞)이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거리표시에서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자리잡은 장승은 16-17세기 임진·병자양란을 거치면서 조선후기 공동체문화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된다. 이러한 장승은 크게 마을장승과 사찰장승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장승은 나무와 화강암으로 제작되는 것이 통례이다. 그런데 나무장승은 재료의 특성상 해마다 또는 몇년 주기로 교체해야만 하기 때문에 세월이 흐르면서 원형이 변질되었을 것이고, 특히 개화바람이 불면서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나 나무장승이나 돌장승이나 장승의 기본형태는 같다. 선사시대부터 우리의 민속에 복합적으로 나타난 일종의 신상으로서 그러하다. 신석기시대 간도에서 출토된 뼈바늘 귀의 인면표현, 청동기시대 암각화의 인물상, 신라 토우나 삼국시대 이래 와당 등에 장식된 귀면문양 그리고, 토속적인 탈이나 도깨비, 불교의 사천왕과 금강역사, 도교의 금장군과 갑장군, 능묘에 세워지는 석인상 등이 종합되어 결국 선돌이나 통나무에 사람 얼굴 내지는 도깨비 얼굴을 조각하여 영적인 힘을 지닌 상징조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조선후기 장승은 민중공동체 정서

구한말 장승은 험상, 각박




그리하여 장승은 나무나 돌에 사람의 얼굴을 변형하여 상징적 수호신상으로 표현하고 몸체에 ‘…장군’하는 식의 이름을 적어 넣는 형식이 기본형으로 정착되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얼굴의 표정인데, 보통 툭 불거진 통방울 눈에 주먹코, 삐져나온 송곳니나 앞니가 그 특징이다. 그리고 머리에 쓴 모자에는 관모형(官帽形)과 전립형(戰笠形)이 있고, 간혹 민머리의 남근형도 있다. 즉 사람의 모습을 빌려 만들면서도 의도적인 변형으로 장승의 이미지를 창출한 것이다. 이러한 장승의 모습을 잘 설명하고 있는 판소리 사설이 <변강쇠가>이다. 장승에 대한 사설은 변강쇠가 과부 옹녀와 함양을 거쳐 지리산에 들어가 살면서 나무하러 갔다가 장승을 뽑아 오는 대목에 나온다.



…장승이 화를 내어 낯에 핏기 올리고서 눈을 딱 부릅뜨니 강쇠가 호령하여 “네 이놈 뉘 앞에다 색기(色氣)하여 눈망울 부릅뜨나, …수족 없는 너란 놈이 생심이나 방울쏘냐.”… 어떠한 큰 사람이 뜰 가운데 누웠으되 조관(朝官)을 지냈는지 사모품대 갖초우고 방울눈 주먹코에 채수염이 점잖으다. 여인이 깜짝 놀라 뒤로 팍 주으며,“ 애겨, 이것웬일인가, 나무하러 간다더니 장승 빼어왔네 그려, 나무가 암만 귀타 하되 장승 패어 땐단 말은 언문책 잔주에도 듣도 보도 못한 말, 만일 패어 땠으면 목신동증(木神動症) 조왕동증 목숨 보전 못할테니….”(김두하, <벅수와장승>(집문당, 1990)에서 재인용)



옹녀의 말을 듣지 않고 강쇠는 장승을 도끼로 뽀개 불 때 버린다. 결국 변강쇠는 팔도장승들이 합의 아래 내린 중병에 드러 눕고 강쇠 계집인 옹녀가 송봉사에게 점을 보는데, 그 점괘가 ‘사목비목 사인비인(似木非木似人非人)’으로 나온다.‘ 나무 같은데 나무도 아니고 사람 같은데 사람이 아닌’장승의 모습을 집약시킨 표현으로, 돌장승의 경우는 ‘사석비석 사인비인’이 되는 셈이다. 또한 장승의 역할과 형태는 조선시대 시문학에 흔히 거론 되지만 판소리 <적벽가>에도 적절히 서술되어 있다.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한 뒤 도망하면서 장승을 만나는 대목에 나오는데, 그 사설을 보면,



…웬 놈의 얼굴인지 방울눈 주먹코에 주토칠 많이 하고, 써렛니 개털수염 뱃바닥에 새기기를 ‘자형주관문(自荊州官門)’으로 ‘남거오십리(南距五十里)’장승이라. 큰 길가에 우뚝 서니 입 있으나 말을 할까 발이 있어 도망할까. 부끄럽기 측량없어, 낯은 일생 붉어 있고, 분한 마음 못 이기어 눈은 항상 부릅떴네. 불피풍우(不避風雨) 혼자 서서 래인거객(來人去客) 호송(護送)터니…(김두하, <벅수와 장승>에서 재인용)

그런데 두 사설 외에도 장승에 대한 민간의 설화나 속담에는 한결같이 미련하고 예절없고 멍청한 화상으로 장승이 묘사된다. 그러니까 장승은 ‘사신비신(似神非神)’이니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비신비인(非神非人)’으로 여겨온 것이다. 장승은 분명히 질병이나 악귀로부터 마을을 보호해 주는 수호신으로서 신성(神性)을 지닌 경배의 대상이면서도 그처럼 노리개감으로 표현한 점은 장승에 대한 친근감을 나타낸 증거이고, 여기서 우리는 삶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민중의 익살과 해학미를 엿볼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조선후기의 돌장승들은 할아버지·할머니상이든 미소년상이든, 나아가 벽사(僻邪)의 의미를 강조한 도깨비상이든, 그 형상을 과장과 변형으로 꾸며냈으나 무섭다거나 괴기스런 표정은 찾아보기 힘들다. 또 경기도 광주 엄미리나 공주 탄천의 장승 등 그런 전통이 잘 계승된 민간마을의 순박한 나무장승 역시 마찬가지다. 민중의 삶에서 우러나온 품성이 진솔하게 실린 결과로, 질박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단순화시킨 조형미를 뿜어낸 까닭이다. 그러므로 조선후기의 장승들은 생산에 직접 참여하는 민중의 공동체적 생활 속에서 삶의 정서를 형상화한 예술로서 평가하기에 손색없는 당당한 민족조각이다. 반면에 구한말 이후에 제작되는 근래의 돌장승이나 나무장승을 보면 대부분 괴기스럽게 변질되어 험상 궂은 표정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우리네 근현대사의 각박한 현실 그대로를 반영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장승 두상은 남근 상징

전립형 벙거지로 ‘수호성’ 강조




장승이 선 곳에는 대개 당산나무 신목의 근처에 나뭇가지나 돌기둥에 새를 얹은 솟대와 선돌 등이 함께 배열되기도 한다. 그런 배치법에 따라 대전 대덕구 법동의 경우처럼 장승 곁에 남근석과 여근석을 각각 나란히 세운 사례도 있다. 정월 보름 전날 산신제와 장승거리제를 지냈던 마을이었는데, 지금은 대덕에 첨단단지가 들어서면서 동제 풍습이 사라진 곳이다. 마을의 북쪽 입구를 지키는 장승은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으로 각각 1백40cm, 1백70cm 정도의 크기이고, 여느 장승보다 대충 쪼아낸 간결한 조각이 힘차면서 그 안면 표정이 애교스럽다. 이들 옆의 암수석은 1m 미만의 자연석이다. 천하대장군 옆의 남근석은 둥근 몸통의 선돌형이고, 여근석은 배가 불룩해서 임신한 여인의 형태로 보인다.

장승의 몸체가 남근석의 형태와도 유사하지만, 일반적으로 장승의 머리에 남근을 상징화해 놓는다. 머리에 수호신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장졸들이 쓰는 전립형의 벙거지를 쓰고 있는 것이 많은데, 그런 돌장승의 경우 뒷모습을 보면 대체로 용두부분을 살짝 덮은 반포경의 남자 성기를 연상케 한다. 부안읍내 동문과 서문의 장승(주장군·당장군), 영암 금정 쌍계사지의 장승, 남원 실상사 입구의 장승들과 주천 호기리 장승, 제주의 돌하르방 등이 그러한 예이다. 이들은 모자의 둥글게 감싼 채양테와 봉긋이 솟은 모양이 남근의 귀두형태를 암시하는데, 가장 흡사하게 닮은 것이 호기리 장승이다.

섬진강에 합류하는 주천(朱川)주변의 너른 평야와 동쪽을 가로막은 지리산을 보고 낮은 언덕 위에 혼자서 북향해 있는 돌장승은 2.7m로 장승 치고는 큰 편이다. 전해오기로는 1850년 마을의 김양근(金養根)이라는 사람이 현몽하여 논에 묻혀 있던 것을 파내어 세운 것이라 한다. 칠월칠석날 김씨가에서 제사를 드려온 이후 가세가 번창하여 남원의 부호가 되었다는 것이다. 몸에 이름이 없고 오른손을 가슴에 올려 옷자락을 쥔 채 서있는 자세가 눈에 띄는데, 제주도 돌하르방과 유사한 점이 독특하다. 육지장승의 경우 대부분이 손을 생략하고 있기 때문이다. 벙거지를 쓰고 입가에 미소가 개구쟁이 소년의 표정으로, 주먹코에 두 눈 아래 같은 크기의 둥근 모양이 있어 마치 4개의 눈을 가진 방상씨 가면 같기도 하고 혹은 곤지를 찍은 것 같기도 하다. 이 장승을 뒤쪽에서 보면 벙거지의 둥글게 솟은 모습과 채양, 그리고 퉁퉁한 몸체가 그대로 남근석의 외형을 닮았다. 이는 인근 호경리의 여근석과 한쌍을 이룰만하다.

이외에도 여천 선소(舟訖)의 당산 아래 돌장승은 마치 수군들의 투구를 쓰고 있는 형상으로 뒷모습이 남근형태이다. 또한 모자를 쓰지 않았으면서 머리모양을 둥글게 올린, 마치 민화 수복노인의 형상을 한 장승들도 있다. 장흥 관산의 활짝 웃고 있는 돌벅수, 나주 다도불회사의 당장군, 남원 운봉 북천리 돌벅수 등이 그러한 예이고, 서울 서대문밖에 있었다고 사진으로 전하는 나무장승 주장군 당장군도 머리모양이 팽팽히 발기되어 잘 까진 용두의 남근형이다. 마을 지킴이인 장승에 악귀방호와 다산의 염원을 그렇게 복합시켜 놓은 것이다.

이에 덧붙여서 장승은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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