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댁들이 찾았던 성신앙터 - 하
한양댁들이 찾았던 성신앙터 - 하
  • 이태호/ 전남대 교수, 미술사
  • 승인 2017.09.25 15:19
  • 수정 2017-09-25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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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과 무악의 남·여근석

인왕산은 서궐과 함께 사직단이 들어설 만큼 권위적인 산세를 형성하고 있다. 나아가 인왕의 산기슭은 큼직큼직한 바위 계곡과 맑은 개울, 송림이 어우러져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살림터와 풍류처로도 각광을 받았다. 백운동(白雲洞), 세심대(洗心臺), 청풍계(淸風溪), 옥류동(玉流洞), 송석원(松石園), 취병암(翠屛岩) 등 계곡과 동네의 이름만 보아도 도학(道學)의 터전이 형성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이름난 곳은 안평대군이 살던 수성동(水聲洞), 현재 경기상고가 들어선 조광조의 제자 성수침(成守琛)의 청송당(聽松堂), 배화여고가 들어선 이항복(李恒福)의 필운대(弼雲臺), 조선 후기 서인(西人)-노론(老論)계의 중심을 이룬 안동 김씨가의 청풍계와 옥류동 일대 등을 손꼽을 수 있다. 그리고 조선후기 진경산수화를 완성한 겸재 정선이나 풍속화의 선구인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示石) 같은 선비화가들이 배출된터이고, 천수경(千壽慶) 등이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를 구성하여 조선후기 서민문학을 부흥시킨 곳이기도 하다. 이들 외에도 뛰어난 사상가와 시인 묵객이 많이 배출되었고, 그럼으로써 인왕산 동편은 명실공히 사림(士林)문예(文藝)의 명소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그처럼 사림의 문화가 터를 잡기 이전부터, 인왕산은 한양의 불교성지였다. 인왕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한 인왕사를 비롯해서, 선승들의 수도처인 금강굴(金剛窟), 세조때 지은 복세암(福世菴), 궁중의 내불당(內佛堂) 등 도성의 네 산 가운데 가장 많은 사찰이 있었다. 특히 인왕사의 인왕은 금강역사상으로 사찰의 입구에 배치되는 불교의 수호신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인왕산은 한양땅을 지켜주는 수문장 역할까지 해왔음을 알수 있다.



인왕산, 암석·바위정령 숭배로 민간신앙의 중심터 돼



한양에서 인왕산은 그같이 컸던 사회적·문화적 역할 이상으로 민간신앙의 중심터였다. 특히 암석 숭배 혹은 바위 정령을 믿는 우리나라 민속신앙의 성향으로 보아, 인왕산의 형세는 그만한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화강암 거암이 넓직하고 듬직하게 솟아 둥그스레한 주봉의 암반은 당당한 위풍을 뽐내고, 그 주변과 계곡에 박힌 크고 작은 바위 형상들은 모두 개성적이다. 모양새에 따라 불리우는 말바위, 매바위, 삿갓바위, 부처바위, 맷돌바위, 치마바위와 조바위 등 그 이름도 재미있고 다양하다.

이들에는 각각의 설화와 의미가 서려 있으며, 특히 치마바위는 중종과 폐위된 신씨(愼氏)와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신씨는 중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공신들의 압력으로 폐위 되었다가 영조때 복위된 단경왕 후이다. 중종은 신씨를 보고 싶을 때면 누각에 올라 신씨의 집쪽을 바라보곤 했는데, 신씨가 그사실을 전해듣고 집안 위쪽에 있는 큰 바위에 자신이 궁중에서 입던 분홍색 치마를 눈에 띄게 덮어 놓았다고 한다. 중종은 그 치마를 보며 신씨를 향한 애절한 감정을 삭혔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선바위를 비롯해서 서울 여인들이 성신앙이나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삼은 인왕산의 주요 바위는 모두 성곽 밖으로 밀려나 있다. 한양에 조선의 도성이 들어서고 유교사회의 기틀이 확고히 잡히면서 그리되었을 것이다. 또 도성이 인왕산 정상을 동서로 가르는 위치에 세워진 탓으로 민간신앙의 터는 자연히 성밖 신세로 전락하였다. 여기에도 무학대사의 패배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온다.

도성의 안팎 서울 사람들이 치성드리러 찾은 가장 영험스런곳은 서성(西城)의 서대문 밖, 홍제동 고개를 넘어가기 전 인왕산 중턱에 우뚝 솟은 선바위이다. 지금의 소재지는 서대문구 현저동이고, 서울시 민속자료 제 4호로 지정되어 있다. 선바위가 있는 주변의 바위들과 땅은 대부분 신령이 깃든 장소이다.



인왕산 중턱 선바위가 최고 치성소



1925년 일제가 남산에 천황의 신사를 세우면서 목멱신사인 국사당을 철거하고, 그 사당을 바로 선바위 아래에 옮겨 지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중요민속 자료 제 29호인 국사당에 오르다 보면 주변이 온통 무속촌을 이루고 있다. 현재 국사당에는 태조와 왕비 강씨부인상을 비롯해서 무학대사, 나옹, 최영장군, 민중전상과 산신, 용왕신, 칠성신, 삼불제석도 등 중요민속자료 제 17호로 지정된 무신도들이 모셔져 있다.

선바위는 두 덩어리의 거석으로 구성된 모양이 마치 인물상을 연상케 하는데, 특이하게도 바위에 수직으로 홈이 패이고 구멍들이 나 있다. 고깔을 쓴 장삼 차림의 승려를 닮은 오른쪽 바위가 승려의 화신이 돌부처로 변한 모습이라 하여 ‘선암(禪岩)’으로 불리우게 되었다고 전해온다. 그런데 이곳에 암자를 짓고 신도들의 기원을 염불해주는 만혁스님의 얘기를 들으니, 기존에 정리된 내용과 사뭇 다른 점도 있었다. 만혁스님이 구술한 이곳 선바위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바위 형상을 장삼차림의 스님 상으로 보아 참선하는 의미의 ‘선(禪)’바위라 하는 명칭은 잘못이며, 원래 제사터라는 뜻의 ‘선(土單)’바위가 옳다. 이곳은 무학대사가 이성계를 위해서 기도한 장소에서 연유했기 때문에 선암으로 이름되었다는 것이다. 무학대사의 1백일 기도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이은 성공적인 조선 건국과 잘 맞아떨어졌다 하여, 선바위는 한가지 소원만을 지성을 다하여 빌면 성취되는 장소로 유명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거암의 선바위는 무학대사와 이성계상이라고도 하며, 이성계 부부상이라 전해오기도 한다.

또한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면서도 성을 쌓을때, 그 장소를 놓고 무학대사와 관료들의 주장이 대립되어 태조가 고민하던 중에 인왕산에 눈이 내렸다고 한다. 산 정상의 능선을 따라 눈이 한쪽만 녹으면서 선이 그려졌는데, 하늘의 계시로 믿고 그 눈자국을 따라 성을 쌓았다는 것이다. 그러는 바람에 ‘선바위가 도성 안에 들어가도록 성을 쌓아야 된다’고 주장했던 무학대사의 뜻이 좌절된 셈이다. 그때 무학대사는 통탄하며 조선시대에 불교가 쇠퇴하고 유학자들에 의해 억압이 지속되리라 예견했다는 것이다. ‘서울’이라는 이름이 눈의 선을 따라 도성의 울타리를 둘렀다는 의미의 ‘설울’, 즉 설성(雪城)에서 연유되었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이 선바위는 신기(神氣)가 서린 곳으로 그같은 설화가 생기기 이전부터 서대문 안팎의 사람들, 특히 한양댁들의 소문난 신앙처였을 것이다. 이 선바위는 자식을 못둔 사람들에게 큰 영험을 내린 장소로 반가나 서민층 아낙네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바위에는 작은 돌을 가지고 표면을 문질러서 붙이면 더욱 효험이 높다고 하여 ‘붙임바위’라 부르기도 한다. 그렇게 치성을 드린 흔적이 바위의 몸체에 여기저기 보이고, 요즈음에도 참배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

그런데 이 장소에서 실제 아이를 원하는 한양댁들의 은밀한 기도처는 선바위에서 50미터 쯤 위쪽으로 형성된 커다란 암석군락 속에 숨어 있다. 큰 바윗덩어리의 절단된 면에 수직으로 길게 패인 틈이 나있는데, 이곳을 더욱 깊게 쪼아내어 여자의 성기모양을 닮게 다듬었다. 보지바위, 이른바 여근석을 조형해놓은 것이다. 그리고 이 바위는 영동의 영국사 삼층석탑 아래에 여자 성기를 새긴 바위와 함께 인공을 가한 여근석으로 흔치 않은예이다.



천길 낭떠러지도 아랑곳하지 않던 득남 열망 반영



초와 제물 등 최근에 치성을 드리고 간 흔적이 지금도 여전하다. 특히 틈새의 아래 부분에 초를 올려놓을 좁은 공간이 있고, 그곳에 촛농이 흘러내려 쌓인 흔적이 눈길을 끌게 한다. 성기의 모양새도 그러하려니와 마치 그곳에서 질액이 분비된 듯 보이기 때문이다. 살짝 인공을 가했지만 자연히 생긴 바위의 틈새와 사람들의 치성행위로 연출된 촛농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현장이다. 외에도 여근석이 있는 암석군락에는 유사한 틈새와 바위구멍이 많으며, 모두 촛농이 흘러 있거나 촛불에 그을려 있다.

이 여근석의 짝에 해당될 법한 남근석은 홍제동으로 넘어가는 무악재 왼편 무악산에 위치해 있다. 무악(毋岳)은 인왕산 서쪽 맞은편에 해발 2백96미터의 낮은 봉우리이고, 능선이 말안장을 닮아서 안산(鞍山)이라 불리운다. ‘무악’이라는 이름은 삼각산의 별명 부아악(負兒岳)에서 연유한 것으로, 아기를 업고 나가지 말라는 의미를 담아 어머니산(母山)이라 지었다고 한다. 이런 풍수설을 반영하듯, 태조가 도성터를 결정할 때 하륜에 의해 무악산 남쪽이 거론될 정도였다. 무악산 정상에는 평안·황해도 쪽에서 전달해오는 봉화대가 있었고 현재 복원 해놓은 상태이다.

정상의 봉화대로 오르는 산등성에는 2미터가 넘는 남근석 형태의 선돌이 둥글둥글한 돌들에 끼어 서있다. 이처럼 선돌을 세운 것은 어머니산 무악의 여성성에 맞추어 남성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함 같다. 자연석이 오묘하게도 귀두부분의 주름까지 그것을 닮아 있는데, 아쉽게 귀두 면적이 조금 작은 편이다. 이 남근석은 그 형태감대로 ‘까진바위’ 혹은 ‘뾰족바위’라 불리우고 몸통 여기저기에 돌로 문지른 흔적과 쪼아낸 크고 작은 성혈자국이 나있다. 아들 낳게 해주는 영험이 그만큼 좋았다는 실상을 반증하는 생채기이다.

까진바위는 동쪽으로 무악재 건너편 인왕산의 선바위와 여근석과 연결되어 서대문 밖 지세의 음양을 맞춘 것처럼 보인다. 헌데 능선의 서쪽으로도 신촌일대와 한강이 펼쳐져 있고, 이화여대 쪽을 향해 있는 것이 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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