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씨되어 날으리!
꽃씨되어 날으리!
  • 안혜성 글, 이경신 삽화
  • 승인 2017.09.25 11:34
  • 수정 2017-09-25 11: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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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지난날로의 여행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발은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빗줄기는 여름 대낮 목마른 꽃망울 위에 내리 꽂히는 소나기처럼 시원스레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빗금을 그으며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발 앞에서 백민홍(白民弘)은 갈증을 맛보았다. 함박눈이 소리없이 내리는 깊은 겨울밤에 그녀의 나신 위에 쏟아지는 물줄기가 대자연의 조화 속과는 무관할 터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풀석 웃었다. 문명의 이기(利器)로 부터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것은 과욕일 듯 싶었다. 매사에 과욕은 금물이라며 그녀는 마음을 눙쳐 먹었다.

민홍은 수십갈래로 갈라진 물발을 올려다 보았다. 그것들은 그녀의 몸을 타고 흐르다가 욕조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자 마자 수챗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무상(無常)한 것 같으니라구! 무심한 물길이 가슴과 가슴으로 만나지 못하고 타인으로 헤어져가는 사람들의 만남의 인연처럼 덧없게 느껴졌다.

올 한해 동안에도 가슴 깊이 품어 안지 못하고 스쳐 보냈던 이들의 얼굴이 물발과 함께 그녀의 시야 밖으로 사라져 갔다. 민홍은 세밑의 분요한 일상 속에서 더욱 또렷해지는 그녀의 홀로됨에 가슴이 시렸다. 그녀는 잡념과 함께 어김없이 찾아드는 스산한 느낌을 지울 양으로 수도꼭지를 올리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래. 1996년 한 해도 저물어가는 오늘 밤 대학 동문들과 어울렸던 송년 모임을 끝내고 집에 돌아온 즉시 제대로 된 샤워를 해보리라고 난 별렀었지.

그녀는 12월 28일인 오늘로 교수직에 관련된 공적인 업무는 물론 사사로운 일들을 대과없이 마무리 지을수있었던 행운에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홀로 살고 있는 작은 아파트로 들어 섰었다. 그러나 매 순간 긴장의 끈을 늦추지 못한 채 살아가는 독신자 특유의 노파심때문이었을까? 그녀는 외출복을 벗다 말고 자문했었다. 미처 손을 쓰지 못한 일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 건 아닌가고. 허나 이제 그녀에게 남아 있는 일이란 매일 그러하듯 몸을 씻는 일이었고 잠을 자는 일이었을 따름이었다. 그 두가지 일 모두 다 홀로 해야만 하는. 조금은 울적했다.

사람의 위치와 직업과는 무관하게 엄습하는 느낌-- 그것은 모든 인간을 시시때때로 공략해 들어오는, 그러니까 아직도 삶의 길을 홀로 그리고 빈손으로 걷는 듯한 고적감과 상실감일 것이었다. 순간 자구본능이 발동했다. 지금껏 무심코 반복했던 단순 행위일 따름인 몸씻는 일과 잠자는 일을 적어도 세밑인 오늘 밤만이라도 ‘좋은 노동’으로 한 단계 격상시켜보겠노라는 치기만만한 바람이었다. 아! 에른스트슈마허였었지. ‘좋은노동이란 사람안에 있는 창조주의 형상과 원초적인 창조력을 되찾아주며 생명을 지닌 모든것들과의 연대를 가질 수 있다’라고 어느 책에서 규정해 주었던 이는? 그렇다면 오늘밤 샤워를 통해서 지난 세월동안 내 영혼과 몸에 내려앉아 있을 터인 감정의 때를 깨끗히 씻어보는거다.

그제서야 그녀는 마치 성례를 치루듯 진지한 손놀림으로 실내복을 벗은 뒤 야밤의 ‘좋은’노동을 위해서 욕조 안에 들어섰었다. 불과 이십여분전쯤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마음이 가벼웠었다. 영혼과 육신의 찌끼를 씻어 버릴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과 아울러 삼십대 중반의 독신 여교수가 한 해의 끝에 지니고 있는 소박한 바람에 대한 자긍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허나 막상 샤워를 시작한 지금 그녀는 갈증에 시달리면서 아울러 조바심하고 있었다. 전신에 더께가 앉아 있는듯한 께름한 느낌을 샤워만으로는 도저히씻어 내릴 수없을 것같은 무력감이 그 이유였을 것이다. 그녀는 총동적으로 온몸에 비누칠을 했다. 새하얀 비누 거품 속에 파묻힌 순간 온몸의 세포가 반기를 드는 듯 전신의 피부가 따끔 따끔 아렸다. 쯧! 그제서야 민홍은 자신이 두번씩이나 거푸 비누칠을 했음을 발견했다. 드디어 그녀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시인했다. 그랬다. 왼종일 목욕에 매달린다 손쳐도 그녀는 해묵은 감정의 앙금을 깨끗히 털어 버릴수 없을는지도 몰랐다. 더께진 감정의 때는 오늘 오후에 있었던 생애 최대의 화해극이 남겨 놓은, 골이깊은 정한(情恨)의 찌꺼기에 다름아닐 터이므로.

그 극적인 만남의 드라마는 삼십여년 간의 불화와 단절의 골을 뛰어 넘으며 그녀의 요절한 부친의 친어머니인 민용옥(閔容玉)여사와 손녀인 그녀 사이에 극적으로 이뤄졌었다. 지난 날 그녀를 백씨 가문의 후사(後嗣)로 인정하는 것마저도 꺼렸던 조모댁으로부터 일주일 전 초청을 받았던 그녀는 오늘 정오에 명실공히 백씨가문의사람으로서 조모댁을 들어 섰었다. 물론 그같은 상봉극은 그녀가 오랜 세월에 걸쳐서 갈망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 질긴 소원을 성취했던 순간 충일감을 맛본 것은 한 순간에 지나지 않았을 뿐 그녀는 소설보다 더 극적인 혈연과의 재회앞에서 깊은 회한과 채무감을 더욱 절감했을 따름이었다. 오랜 동안 다만 증오하지 않을 양으로 안간힘을 써왔을 뿐인 혈육의 손을 맞잡는 행위야말로 그녀 자신을 끌어안는 자신과의 화해에 다름아니었기 때문이었을까?

뿐만인가. 그녀는 또한 뒤늦게 이뤄진 혈연과의 만남앞에서 뿌리를 되찾은듯한 층일감을 훨씬 웃도는 허탈감을 맛보았었다. 때문에 조모댁의 대문을 나선 뒤 그녀는 오후 내내 시내를 배회했었다. 결국 그녀 자신에 대한미움에 지나지 않을터인 혈육에 대한 반감을 억지로 제거해 버린 가슴속에 진정한 혈육애가 삽시간에 차오를리가 없었기에 그랬을 것이었다. 참 사랑이란 단지 원한다는 이유만으로는 모든 이들이 수월하게 그러쥘수 있는 상품이 아닐터이기에.

그녀는 다음 순간 뇌간을 찌르는 두통에 이마를 찌푸렸다. 그녀는 이제 ‘좋은 노동’에 대한 치기만만한 바람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그녀는 다만 한시 바삐 목욕을 끝내고 쉬고만 싶었다. 수도꼭지를 최대치로 틀어올린 그녀는 한결 드세어진 물발에 전신을 맡긴 뒤 잡념을 잊을 셈으로 두눈을 감았다.

그녀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캐나다 록키’북단에 자리한 ‘아타바스카’폭포에서 터져나오는 낙수(落水의 굉음을 들은 듯한 환청 탓이었다. 빙하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거대한 물기둥이 되어서 벼랑 아래로 떨어지던 대자연의 노호(怒號)가 귓전을 파고 든 순간 감은 눈 하나 가득 뽀오얀 물안개를 토해내며 천길 계곡아래로 내려찍히던 폭포의 장관(壯觀)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지금으로부터 이년전 가을이었다. 그녀가 대자연의 경관앞에서 질기디 질긴 자의식의 족쇄로부터 한 순간이나마 놓여났던 것은. 아홉해의 고된 미국 유학생활을 노인복지학 박사학위취득으로 간신히 마무리지은 직후였던 그 때 그녀는 어렵사리 얻어낸 학업의 성취를 실감할 수 없었으리 만큼 절망의 덫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삶의 패배자로 나가떨어진격인 자신에 대한 위기감이 엄습하자 자칫하면 그대로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무섬증을이기지 못한 그대로 여행가방을 꾸렸었다. 한 남자와의 잘못된 만남을 이별이라는 미봉책으로로도 끝맺는 것이 그나마 미래를 위한 차선책이 될 수 있으리라는 결론에 도달한 직후였었다.

그러나 당시 캐나다 록키 인근에 있는 재스퍼 파아크로 떠났던 그 나들이는 삶의 도망자로 전락한셈이었던 그녀에게는 영원히 도착할 수 없을 것 같은 머나먼 장정(長程)에 불과했었다. 비행기가 연착하는 바람에 무려 열시간 가까이 기내와 공항에서 시간을 허비한 뒤 캐나다의 뱅쿠버에 도착했건만 그녀는 다시 에드먼턴 행 비행기로 옮겨 타야 했고 두시간 뒤 에드먼턴 공항에 도착하고도 내리 네시간을 렌터카로 달려서야 목적지에 당도할 수 있었다.

드디어 일만년의 빙하기를 거쳐온 아타바스카 산자락에서 녹아 내린 물줄기가 일궈낸 거대한 아타바스카 폭포 앞에 섰을 때 그녀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토해 냈었다. 전신을 옭죄고 있는 듯한 구속감과 절망으로 부터한 순간이나마 놓여난 듯한 해방감 때문이었다. 아니 그것은 수만년 동안 내려 온 빙하기의 침묵을 폭포수의 굉음으로 터져 나오도록 섭리하신 창조주의 권능에 대한 외경심과 신뢰에서 비롯된 안도감이었는지도 몰랐다. 십년세월을 침묵으로 참아낸 내 인고의 삶 역시 언젠가 한 줄기 강물로 풀어져 내리다가 새 새명을 품어 안은 채 살아 있음을 목청껏 외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녀는 미래에 대한 한가닥 소망을 그 폭포의 노호 속에서 목도했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그날 앙망했었다. 계곡위로 튀어오르는 폭포수의 포말들처럼 그녀 역시 쓰라린현실을 박차고 일어 서서 보다 자유로운 삶의 자리로 날아 오를 수 있기를.

그리고는 ‘이 거대한 폭포수는 그 스스로 길을 만들어 흐른다’라는 폭포수 안내판의 글귀를 마음에 아로새기면서 그녀 또한 다짐했었다. 나 역시 스스로 삶의 길을 찾아 나서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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