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댁들이 찾았던 성신앙터 - 상
한양댁들이 찾았던 성신앙터 - 상
  • 이태호 전남대 교수, 미술사
  • 승인 2017.09.25 11:39
  • 수정 2017-09-25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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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의 산신 정녀부인과 부아암

다산을 기원하는 성신앙은 선사시대부터 노동력 증대의 필요성이라는 사회적 요구에 따라 성장하였고, 남녀의 성기 모형을 숭배하는 풍습이 오랫 동안 유지될 수 있었다. 자연스레 농촌이나 어촌을 중심으로 풍요와 다산을 희구하는 공동체 문화의 한 유형화가 성신앙물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또 그러한 현상은 농어촌의 마을 공동체 생활현장 뿐만 아 니라 정치 행정도시이고 상업이 활발했던 수도 서울지역에서도 예외일 수 없었다. 오히려 서울이 농어촌 지역보다 극성스러웠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특히 조선시대 서울은 유교사회의 중심부였음에도 불구하고 성신앙적 민속문화가 수그러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왕족이나 사대부 가에서 남아선호와 가손번창의 욕구가 더욱 절실하였을 것이다. 아이를 못 낳은 경우 칠거지악의 하나로 여성을 몰아세웠고, 또 일부일처 사회였음 에도 불구하고 후손을 핑계삼아 버젓이 후처나 애첩을 두는 경우가 왕족 사대부가에 빈번 했던 점은 그 실상을 대변하는 일이다. 그러니 사대부가나 궁중의 여인을 포함하여 한양댁 들은 아이를 갖기 위한 노력 속에서 신령스런 장소를 찾아야만 했을 것이다. 서울 도성 안팎의 자연환경 역시 그러한 욕구를 만족시켜 주기에 충분한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사대부여인들,‘ 대잇는’책임 으로 기자신앙에 더욱 매달려

18세기 영조때 우리 강산을 소재로 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완성한 거장 겸재(謙齋) 정선(鄭敾)은 서울 실경도 중에서 성리학자 취향의 절경과는 무관한 그림을 남기고 있다. 특히 북악의 오른쪽 능선의 부분을 그린 <부아암도(負兒岩圖)>와 같은 그림이 그 예인데, 서울 사람들의 민속이나 성신앙 장소가 아닌가 싶어 관심을 끈다. 부아암이 기자(祈子) 신앙터로 삼을 만큼 남근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바위의 모양이 아기를 업은 것과 같다 하여 ‘부아암(負兒岩)’이라 이르게 된 듯하나, 막상 그 형태로 보아서는 남근석에 근사하다.

또한 겸재는 <부아암도>외 에 북악산 계곡에 자리잡은 <독락정도>나 북악산 전경도들 에서도 유난스레 부아암 바위를 부각시켜 그린 편이다. 이러한 과장은 경학(經學)에서 특히 주역에 밝았다고 전해오는 겸재다운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겸재의 진경작품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화면 구성, 형상의 과장표현, 그리고 필묵법 등에 음양으로 상징 되거나 재해석된 형식미가 겸재 화풍의 독창성으로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원형구도와 태극형의 화면구성, 금강산 그림에 보이는 붓을 세워 죽죽 내리그은 수직준법과 붓을 뉘어 뚝뚝 찍은 미점법의 대조, 바위나 폭포의 남녀 성기를 연상시키는 변형 등이 두드러져 있다. 나아가 음양산수도 같은 그림에는 언덕이나 폭포에 아예 남성과 여성의 성기모양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도록 표현 한 그림도 남겼을 정도이다.

 

성리학자 취향에 상반되게 성 표현 노골적인 겸재 한양실경도

그러한 겸재가 북악산 정상 부분에 불룩 솟은 부아암의 형상을 놓칠리 없다. 겸재의 부아암 실경 그림에서는 선돌 위 에 얹힌 둥그스레한 바위 덩어리를 팽팽하게 발기된 남근의 귀두 모양으로 유달리 강조한 점이 눈에 띈다.

또한 북악은 도성의 북쪽 외곽을 병풍처럼 두른 삼각산에 서남으로 뻗어 내려온 줄기에 솟아 있는 산이다. 삼각산의 중앙 봉우리인 만경대(萬景臺)와 직접 이어진 것이다. 그래서 북악산은 삼각산 산신을 겸해서 모신 백악신사(白岳神社)가 설치될 만큼 경복궁의 호위 진산으로서 추앙을 받았고, 남산의 산신을 모신 목멱신사(木覓神社)와 함께 국가에서 운영 하는 사당의 역할은 물론이려니와 도성 사람들의 주요 신앙터로 자리잡혔다. 그리고 백악 신사에는 정녀부인(貞女夫人)이라는 여신상을, 목멱신사에는 국토신인 남신상을 모셨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산신은 조선을 개국하는데 큰 도움 을 준 부부로 칭송되었으며, 이는 남녀 음양의 조화를 염두에 둔 배치라 하겠다.

삼각산의 산신으로 정녀부 인상을 모신 것은 삼각산이 ‘용이 서리고 뱀이 버티고 앉은 형세’의 화려한 산(옛이름 華山)인 점과 ‘아이를 업은 여인의 형상’이라 하여 부아악(負兒岳)이라고 불리운 점과 관련될 것같다. 그런데다 부아악인 삼각산 형세의 축소판이 랄 수 있는 부아암이 북악 정상에 남근모양으로 불쑥 솟아 있으니 금상첨화격인 셈이다. 정녀부인은 남성형상인 부아악과 부아암을 달래주는 여성 산신에 해당된다 하겠다.

이러한 백악신사의 터가 어디였는지 현재 정확한 위치를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신사에 관한 기록을 종합해 보면 산의 동쪽 정상에 있었다고 전해오는 것으로 미루어, 사당은 부아암과 가까운 근처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백악신사와 정녀부인은 도성의 어느 곳보다도 영험이 높았던 만큼 치성드리려고 이곳을 찾는 인파들이 당연히 많았다고 한다.

백악신사를 개설한 조선 초기부터 사족과 민간의 여성들이 북적대었다고하니 여러가지 잡사와 불미스런 일들이 자주 벌어졌던 모양이다. 여기에 바위굴이나 음습한 터에 암자 를 짓고 기거하는 승려들까지 가세하여 사회문제를 일으키기까지 했다. <세조실록>(7년 4월 己亥條와 5월 庚子條)에 ‘암자를 폐쇄하고 중들을 쫓아 냈다’는 기록이 그러한 사실을 잘 반증한다.

남녀산신을 조선 개국의 공로자로 칭송, 음양조화 신경써

나아가 북악산 정상에 오르는 동쪽 기슭에는 수석(水石)과 송림, 숲이 어울린 도성의 최고 유원지 삼청동 계곡이 자리잡고 있었으니 방탕한 남녀의 놀이터로 좋은 장소가 당연히 되고도 남았을 법하다. 민간의 남녀들 뿐만 아니라 정녀부인에게 치성을 드리러 오르던 사족의 부녀자들까지 합세하여 음사가 벌어졌던 것이다. 그런 정황을 시사하는 일화가 장난꾸 러기로 이름난 이항복을 빌어 아래와 같이 전해온다.

오성대감(鰲城大監) 이항복(李恒福)이 스무살 안팎인 약관(若冠)시절, 벼슬 높은 사대부 집안 아낙네들이 해마다 정월 대보름 전에 떼지어 북악산에 오르내리며 치성 드리던 관습을 알고, 하루는 도포 입고 수염 달고 산 중턱 높직한 바위 위에 점잔을 빼며 의젓하게 앉아 있었다. 이윽고 아낙네 일행이 늙고 젊은 나이대로 줄지어 올라오고 있었다. 오성은 이때다 싶어 점잖게 목소리를 가다듬고, “얘들아-”하고 점잖게 불렀다. 부녀자 일행이 뜻밖의 일에 깜짝 놀라 저만치 높직한 바위를 올려다보니 호호백발의 노인이 앉아 있는 바람에 더욱 눈이 휘둥그래져서 어찌 할 바를 몰라 하였다.

“나는 산신(山神)인데 치성 드리는 너희들의 정성을 착하게 여겨 오늘 너희들의 죄를 말끔히 씻어 주려고 내려 왔느니라. 앞에선 나이먹은 너부터 차례로 그 동안의 죄를 고백하되 하나라도 숨긴다면 내가 다 알고 있는터라 죄만 더 무거워지리라.”

늙은 아낙네부터 젊은 새댁까지 차례차례 산신께, “저는 외간 남자와 몇 번 만났습니다”하는 식으로 마음 졸이며 아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튿날 청년 이항복은, “도성안의 행세께나 한다는 집안에도 부정(不貞)한 아낙네가 적지 않더라”며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고 한다.(김영상, <서울 600년> 1권(대학당, 1994)에 서 재인용)

국가에서 봄과 가을로 산신제를 경영하던 성안의 사당이 귀천을 가리지 않고 치성드리는 일을 빌미삼은 탕부와 음녀의 유흥터 겸 음사(淫祠)로 변질되자 언젠가부터 폐쇄시킨 것같다. <중종실록>(3년 3월 成申條)에는 ‘사족부녀와 잡녀잡인의 출입을 금지시켜야 한다’는 요청이 보이고, 19세기 고종때 발간된 <동국여지비고> 에는 백악신사가 목멱신사와 함께 폐지된 것으로 나타나 있 다. 그런데 백악신사의 정녀부인과 사대부 사이의 갈등에 얽힌 다음과 같은 야사가 전해오고 있어 관심을 끈다.

치성 아낙네 외도고백 이끌어 낸 오성대감의 기지

일찍이 석주(石州) 권필 (1569-1692)은 어렸을 때 북악 꼭대기에 올라가서 놀다가 백악신사 안에 걸어 놓은 정녀 미인(貞女美人) 신위(神位)의 화상(畵像) 족자를 박박 찢어 버렸다. ‘도대체 조그마한 여신이 무엇이기에 이 밝은 하늘 아래서 뭇남녀들의 신앙을 받는단 말인가?’하는 생각이 든데다 끊이지 않고 줄지어 찾아 와서 그 앞에 굽실거리는 뭇사람들의 겉모양이 또한 우스꽝스럽기에 그렇게 한 것이었 다. 그런데 그날 밤 꿈에 하얀 저고리에 청색 치마를 두른 나이 어린 꽃다운 여자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나타나서 이르는 것이었다. 

“나는 하느님의 따님으로  하느님 앞에서 일하는 국토(國土)라는 남자 신(神)에게 시집 온 정녀부인(貞女夫人)이다. 고려의 나라 운세가 다 되어 하느님께서 이씨(李氏)를 도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국토신(國土神)으로 하여금 남산(南山)에 내려와서 동쪽땅(東土) 조선을 든든히 지키게 한 뒤로 내가 남편과 헤어진 것을 하느님께서 각별히 동정하사 백악으로 내려 보내셔서 국토신과 함께 나라를 지키게 하였거늘 이제 2백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너와 같은 어린 아이에게 모욕을 당하고 보니 분을 참을 수 없다. 머지 않아 하느님께 하소연하여 원수를 갚을 터이니 그리 알아라”하고 벼르듯이 사라졌다.

꿈결에도 그 모습이 분명 백악의 정녀부인 화상 그대로라 꿈을 꾼 뒤로 꺼림칙한 마음을 금치 못해 하였다. 그로부터 수십년 후에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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