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듣는 한국 여성의 삶과 역사 - 대한민국 최초 여군장교 박을희
말로 듣는 한국 여성의 삶과 역사 - 대한민국 최초 여군장교 박을희
  • 여성신문
  • 승인 2017.09.25 11:06
  • 수정 2017-09-25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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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군과 여죄수의 어머니로 살아온 한평생
한 자매임 실감하며 여생을 여자 재소자 교화에 헌신

<영진직업보도학교>가 폐교된 후 나는 감리교 은퇴 여교역자를 위한 <안식관>의 관장직을 맡았다. 정릉에 위치한이 <안식관>이 세워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이었다. 내가 처음 관장으로 부임하고 보니 그곳에는 목사님 두분, 전도사님 열여섯분, 그외 봉사자들까지 모두 스물 한명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분들이 각자 음식을 잡숫고 싶을때 잡숫고, 또 식사 장소도 어떤 분은 식당에서 또 어떤 분은 자신의 방에서 하는 등 단체 생활에서 지켜져야 할 질서가 정립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일을 보는 사람들이 매우 고단해 하고 힘들어 하였다.

나는 생각 끝에 음식을 부페식으로 바꾸고 식사는 반드시 식당에서 정해진 시간에 함께 모여 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여기 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군대식이라는 것이었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반응이었기에 그 분들을 잘 설득하고 일하는 사람들의 어려운 입장을 설명하였더니 시간이 지날 수록 이구동성으로 좋다고 하였다.이런 식으로 3년동안 관내 질서를 잡아갔다.



군 복음화 후원회 회원으로

재소자 복음전파 나서기도




그러면서 나는 한경직 목사님이 하시는 ‘군 복음화 후원회’의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교도소 전도를 하기 시작하였다. 수감된 여자 재소자들을 매주 방문하여 설교하고 그들의 문제를 들어주는 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가려고 하니 교도소에 갇혀있는 죄수를 찾아보고 전도한다는 일이 무섭고 두렵게 느껴졌다.

드디어 내가 처음으로 의정부 교도소에서 설교를 하게 된 날,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말씀과 기도로 중무장을 하였다. 그리고는 무엇으로 그들에게 기쁨을 줄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예수님이 촛불을 들고서 문고리없는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서 계신 사진을 가지고 갔다. 그들에게 ‘먼저 마음의 문을열라’는 간곡한 뜻을 그림으로 전달하려 한 것이었다.

교도소장의 안내로 빛이 잘 들지않는 어두운 건물 안으로 따라 들어가 보니 푸른 죄수복을 입은 여자 재소자들이 1백명 가량 복도에 죽 늘어서 있었다. 그들을 가만히 살펴보니 비교적 앳된 나이의 아가씨에서부터 나이 지긋한 중년의 여인들도 있었다. 몸치장도 예쁘게 하고 싶고 가족들과 오손도손 살고 싶은 욕망이 저들에겐들 왜 없으랴만, 똑같은 색, 똑같은 디자인의 푸른 수의 속에 갇혀있는 모습이 얼마나 안쓰러워 보이던지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말을 시작하였다.

“나는 여러분들 보다 더 큰 죄인입니다. 세상에 드러나는 죄를 짓지 않았을 뿐, 그동안 내가 지은 죄들을 생각하며 여러분들을 보니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대충 이런 요지로 말을 하다보니 어느새 그들도 조용히 내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이렇게 그들과 접촉하는 사이에 나는 그들도 내 동포요 형제임을 느끼게 되었다. 또 그들과 상담을 하면서 여러가지 나쁜 환경에서 잘못된 길로 빠져들어간 사연을 알게 되었다. 그 중에는 너무나 안타까와서 함께 붙들고 울고 싶은 경우도 있었다. 나는 측은하고 불쌍한 생각에 그들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따뜻한 가정과 좋은 환경에서 자라고, 하나님을 알고 신앙 생활을 했었다면 그들도 죄를 짓지않고 살았을텐데….

동정과 전도의 열이 일어 그때부터(1967년) 지금까지 30년간 나는 하루같이 교도소 선교에 몸을 바치게 되었다. 교도소에 수감된 사람들은 가족이나 친구도 잘 찾아주지 않는다. 그들은 외롭고 쓸쓸하고 괴롭고 사람이 그립고 사랑에 굶주려 있다. 나는 용돈을 털어 한달에 한번씩 떡 서말과 다락방 1백권씩을 가지고 그들을 찾았다. 김장 때에는 아예 따로 큰 독 서너독에 김치를 넉넉히 해놓고 양동이로 김치를 날랐다. 또 명절 때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가래떡을 뽑아 간장과 참기름을 찍어 먹게 하였다. 나는 이렇게 군 연금 13만원 받는 것을 모두 그들을 위해 썼다.



“어머니라고 부르게 해달라”

재소자들 간청하기도




이렇게 의정부 교도소 방문이 한 5년 쯤 지나자 그들과 나는 사랑의 띠로 하나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내게 “어머니라고 부르게 해달라”는 청을 했고, 내 별명은 어느새 ‘여사(女舍)의 어머니’가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찾아주는 것 만으로도 고마와하던 그들도 어느새 그리스도의 사랑의 말씀에 가슴을 열고 귀를 기울여주었다. 나는 개인 면담을 통해 내가 이 나이까지 알지 못하고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좋은 인생 공부를 한 셈이었다. 그들을 알면 알수록 내 마음은 점점 더 겸손해졌고, 그들을 함부로 대할수가 없었다. 내가 그들을 만나러 갈 때는 주로 한복을 입고 갔는데, 옷색깔이나 매무새에 많은 신경을 쓰게됐다. 혹시라도 그네들을 자극하여 상처를 주지않기 위함이다.

그 후 나는 이 일로 1985년 김성기씨가 법무장관이던 시절과, 1989년 허영주씨가 법무장관이던 시절 이렇게 두번 장관 표창을 받았다. 또 교회에서 교통비라고 40만원을 거두어 주어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나는 그 돈으로 아무도 찾아주는 사람이 없는 재소자들에게 영치금을 넣어주었다. 또 남편(전 청주 서원대 교수, 청주 시향을 지휘하며 교회 성가대를 이끈 음악인)과 다른 가족들의 도움도 컸다.

그러던 어느날, 의정부 교도소 여사 안으로 들어서니 눈에 띌 정도로 사람들이 확 줄은 것을 알게 되었다. 깜짝 놀라서 소장에게 물어보니 30명이 공주 교도소로 넘어갔다는 것이었다.

아침부터 눈이 쏟아지던 날, 나는 눈길을 헤치며 공주까지 그들을 찾아갔다. 공주 교도소장을 만나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그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그의 말은 한마디로 “안된다”였다. 나는 사정을 하여 결국 직원 식당에서 만나는 것을 허락받았다. 그때의 그 상봉 장면은 내 평생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감격적인 것이었다. 영문을 모른채 직원 식당으로 온 그들은 나를 보자 와락 달려 들어 목을 껴안고 울었다. 어떤 이는 내 꿈을 꾸었다고도 하였다. 삽시간에 직원 식당은 울음바다로 변하였다. 얼마나 고통스럽고 외로웠으면 그랬을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시는 마음이 이러할까? 그 후부터 나는 의정부교도소와 공주교도소를 매달 한번씩 꼭 복음을 들고 찾아갔다. 이들이 바로 나와 교도소와의 첫사랑이었기에 그들에게 향한 나의 마음은 더 각별하였다.

특별히 의정부 교도소에서는 ‘어떻게하면 이들이 출소 후에도 죄를 짓지 않고 재생의 길을 걷게 할 수 있을’ 곰 생각하다가 미용기술과 타자를 가르치는 방안 등 몇가지를 건의하였다. 그 결과 미용기술이 통과되어 그때부터 일주일에 한번씩 미용교사가 와서 이들에게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또 국가시험을 치를 수 있는 방침도 마련되어 연간 5-10명 정도가 합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산넘어 산이었다. 이들이 사회에 나와도 전과자라고 하여 취직이 안되는 것이었다. 이 사회에서 함께 살아야 할 사람들임에도 나쁜 짓을 안 할 도리가 없게 사회가 그들을 잔인하게 몰아 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위해 뭔가 회관같은 것이라도 짓고 싶지만 나의 힘은 너무나 미약했다. 물론 드물게는 배신감을 안겨주는 사람들도 있어 힘이 빠질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9)’는 성경 귀절을 되뇌이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주님 뜻에 이끌려

순종하며 지나온 삶




지금은 청주에 여자 전용 교도소를 만들어 여자 재소자들은 모두 그곳에 모여있다. 그래서 의정부로 공주로 다니던 나도 이제는 매달 한번씩 청주로 간다.

이러한 조그만 봉사에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철저히 보상해 주시는 듯 80년도부터는 해외 나들이를 허락해주셔서 기억에 남을만한 많은 추억담을 가질 수 있게 하였다. 그 중에서도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세계 감리교여성대회에 참석했던 일, 케냐의 나이로비와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 코스타리카의 산호세에서 열렸던 국제 교도 선교 협의회 세계대회, 싱가폴 교도소를 방문했던 일들이 새롭다. 그러는 사이 정동교회 장로로 재임했던 나는 1996년 5월 퇴임을 하였다.

요즘들어 이따금씩 나는 지금까지 칠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내가 남긴 자취들을 뒤돌아보며 감회에 젖곤 한다.일제의 압박이 가장 심하던 시기에 태어나 성장하고, 대학 졸업 후 결혼, 그리고 그 후에 이어진 다양한 경험의 나의 인생은 내가 끌려온 삶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나는 과거로 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모든 것이 하나님의계획 아래 이루어진 것이며, 따라서 다가오는 미래에 있을 모든 일 역시도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을 믿고 주어진 현실에 충실하고자 한다. 그래서 선한 싸움 다 싸우고 달릴 길을 다 달린 후, 믿음 안에서 그 모두를 이루었노라고 말할 수 있기를 원한다.

마지막으로 내가 평소에 애송하는 시 한구절을 덧붙이고자 한다.



무엇이나 얻을 수 있게 건강한 체력을 달라고 신께 구했으나 나는 약한 몸으로 태어나 겸손히 복종하는 것을 배웠노라.

큰 일을 하기 위하여 건강을 구했더니 도리어 몸의 병을 얻어 좋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노라.

부를 얻어 행복하기를 간구했으나 나는 가난한 자가 됨으로 오히려 지혜를 배웠노라.

한번 세도를 부려 만인의 찬사를 받기 원했으나 세력없는 자가 되어 신을 의지하게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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