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한 여성모습 일깨워 줘

 

한지현 /광운대 국문학과 교수
한지현 /광운대 국문학과 교수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복된 일이지만 특히 어린 시절에 스승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그 때문에 삶의 역경을 뛰어넘는 용기를 지니고 살아왔다면 그것은 분명 드문 축복임에 틀림없다.

중학교 1학년때부터 박사 논문지도교수까지 40년 넘는 스승이신 이선영 선생님은 학창시절부터 나를 늘 하나의 가능성으로 보아주셨다.

결혼을 계기로 학부 전공을 국문학으로 바꾼 나는 내가 꿈꾸던 대학교수가 되기 위해 대학원도 마치고 순조로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74년을 계기로 나는 반체제 인사의 아내로서 모든 현실적인 활동이 봉쇄 되었고 다시는 그런 꿈을 꿀 수도 없게 정신없이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오랜만에 선생님을 만난 나는 선생님의 기대와는 거리가 먼 내 생활과 행색이 부끄럽기만 했다. “아무 것도 못하고 지내요”라는 주눅 들린 나의 말씀에 “무슨 말이야? 세아이의 어머니요 아내로서의 일은 얼마나 대단한 일이야”하시던 그 곡진하던 말씀은 잊을 수가 없다.

그 후 나는 무엇을 하든지 나의 처지대로 최선을 다하고 살았고 드디어는 선생님 밑에서 박사 논문도 쓰고 늦깎이 교수도 되었다. 나는 지금도 논문을 쓸 때면 꼭 선생님을 의식하고 선생님을 실망 시킬까봐 조심하게 된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가네’라는 노래는 언제불러도 가슴 이 울컥한다.

양일선 / 연세대 식품학과 교수

1969년 연세대 가정대 입학을 앞두고 처음 대면했던 최이순 선생님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나의 머리 속에 잊혀지지 않고 남아있다. 한복을 입으시고 앉아 계셨는데 금테안경 너머로 보이는 선생님의 눈초리가 얼마나 매섭게 느껴졌던지 마치 한눈에 나의 모습을 다 파악하고 계신듯한 얼굴 이셨다.

그러나 최이순 선생님은 그 많은 가정대 학생들의 출신 고교며 가정환경까지 파악하고 계셔서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일일이 도와주실 정도로 자상하신 분이셨다.

1956년 연세대 가정대학과장으로 부임하신 최이순 선생님은 연세대에 처음으로‘여학생처’를 만들어 이름뿐이었던 남녀공학에서 여학생들이 자신의 능력을 키우며 학문에 정진할 수 있는 교육의 터전을 마련하셨으며 학교행정에 여교수가 독자적인 권한을 갖고 참여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신 분이다.

가정대를 최초로 설립 하시면서 각 고등학교에 직접 홍보하시는 것을 마다 하시지 않으셨는데 특히 가정대의 중요성에 대해“가사를 위한 단순한 기능만을 배우는 곳이 아니다.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의식주와 가족문제를 원활히 해결해 줄 수 있는 자연과학이자 종합학문이다. 인류복지에 기여하는 여성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배워야 하는 학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기억에 남는다.

또한 미국유학시절 결혼생활과의 병행 과정에서 갈등을 겪고 있던 필자가 선생님에게 고민을 털어 놓은 편지를 올렸더니 당시 암으로 힘겨운 투병생활 중이셔서 글씨쓰기조차 힘든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끝까지 공부를 마칠수 있도록 격려의 글을 편지로 보내주신 선생님을 생각하면 선생님 자신은 절제된 생활을 하셨으면서도 제자사랑만큼은 정말 헤프게 하셨던 분이시다.

미국에서 공부하실 때 한국여성에 대한 인식을 서양인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유학시절 내내 한복을 고집하셨던 최이순 선생님은 87년 9월에 돌아가셨는데 그 시신을 연대 의대에 실험용으로 기증하겠다는 유언을 남기셨다. 반세기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최이순 선생님을 위해 제자들은 해매다 추모예배를 드린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