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타·욕설로 우리 가슴속 불꽃 못 꺼
“4·19 혁명은 자랑스러운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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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관옥 / 목사, 4·19 혁명 여성 공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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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웅 / 여성신문 사진기자 (asrai@womennews.co.kr)
“‘우리도 나가자!’ 닫혔던 교문이 열리면서 운동장에 모여 있던 수천 명의 학생들이 스크럼을 짠 채 큰 소리로 교가를 부르며 거리로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1960년 4월 19일 중앙대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2학년이었던 홍관옥(70·사진) 목사는 50년 전 그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날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등교해 수업을 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운동장에서 학생들의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운동장은 이미 교복을 입은 수천 명의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고, 임영신 총장님이 교단에서 학생들을 만류하며 울고 계셨습니다. 여학생들 몇 명이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데 제 마음이 두근거려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가방을 던져놓고 다섯 명 정도의 우리 여학생들은 대열의 뒤를 따라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홍 목사는 흑석동에 있는 중앙대학교를 출발해 한강대교를 건너 서울역에서 시위대와 합류했다. 학생 시위대 주변에는 수많은 시민이 박수를 치며 힘내라고 응원했다. 시청 앞에서 연세대 학생들과 합류한 뒤 광화문과 중앙청을 지나 경무대 쪽으로 향할 때 갑자기 총성이 들렸다.

“경무대 쪽에서 한 남학생이 피로 물든 점퍼를 휘두르며 ‘우리 형제가 이렇게 죽어가고 있다!’고 외쳤어요. 그 때 우리가 정말 지금 죽음 앞에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위대는 을지로에 있는 내무부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여학생들이 시위대 맨 앞에 서서 교가를 부르며 구호를 외쳤다. 여학생들은 신발을 잃어버리고, 치마가 찢어진 채로 내무부 앞에서 경찰들과 대치하며 시위를 이어갔다. 오후 4시쯤 시청 쪽에서 대포 같은 소리가 난 뒤 홍 목사 앞에 대치하고 있던 경찰들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기 시작했다. 홍 목사와 그의 친구는 치마로 얼굴을 감싸고 부둥켜안은 채 아스팔트 바닥에 엎드렸다.

“몇 분 후 정신을 차리고 그 자리를 피하려고 일어나는 순간 누군가 내 머리채를 움켜쥐고 총개머리로 내 몸을 사정없이 쳤습니다. 친구는 넘어진 채 질질 끌려갔습니다. 마구 걷어차이면서 내무부 안으로 끌려들어간 뒤 한 경찰관이 내 얼굴 정면을 때려 코에서 피가 쏟아졌어요.”

함께 잡혀온 10여 명의 학생들은 지프에 태워져 지하실로 끌려가 취조를 당했다. 조서 작성 후 강당으로 옮겨졌는데 200여 명의 사람들이 감금되어 있었다. 다음날 아침 교수님들의 도움으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음날 집에 가니 가족이 나를 찾아 시체가 있는 곳을 헤맸다고 합니다. 함께 잡혀 갔던 친구는 결국 퇴원 후에 몸이 좋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나는 세월이 지나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을 받아 4·19 공로자 회원으로 가입돼 있습니다.”

홍 목사는 4·19를 “학생만의 시위가 아닌 전 민족적인 혁명”이었다고 회고하면서, 민족의 혁명을 이끌 수 있었던 것은 학생들의 애국심과 순수한 열정이었다고 말한다.

“불법 선거가 모두를 분노하게 했고, 특히 여학생들은 고등학교 시절 여학생들의 국가적 위치의 중요성과 나라와 민족에 대해 사랑하는 마음을 배워 더욱 가슴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기독교 학교만을 다녔던 저는 좀 더 특별했던 것 같습니다.”

홍 목사는 시위 도중 붙잡혀 중부경찰서에 감금되어 있을 때 두려워하는 친구를 위로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경험했다고 한다. 이날의 경험은 이후 그를 목사의 길로 인도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저는 매 맞아 몸을 가누기 힘든 상태에서 일어나 앉아 손을 모아 기도했습니다. 그 순간 평안을 경험했고, 그 후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됐습니다.” 4·19 혁명 공로자 175인 중 여성 공로자는 단 5명이다. 그 중 한 사람인 홍 목사는 여학생들이 시위에 참가한 것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부상을 입은 친구, 이루 말할 수 없는 구타와 심한 욕설을 들은 친구들(여학생)이 자신들의 경험을 나타내지 않았고, 실명하게 된 위험 속에서도 고발하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저와 친구들 모두 공로 따위는 생각한 적도 없으며 보상이란 것도 상상하지 않았어요. 우리 여학생들은 그런 면이 있었지요.” 4·19를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몸과 언어와 피로 호소한 민족적 인간운동”이라고 정의하는 홍 목사는 4·19 혁명을 “우리 국민이 기념하고 교훈으로 삼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하는 정신적 자산”이라고 힘주어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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