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놀라운 결집력, 그리고 무서운 편협성

한국어에 ‘우리~’라는 표현은 정말이지 광범위하게 쓰이는 표현 중 하나다. 외국어에도 ‘우리’라는 표현은 있지만, 한국어에서 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쓰이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한 아이가 자신의 엄마를 부를 때도 ‘내 엄마’라는 표현보다는 ‘우리 엄마’라는 표현이 더 자주 쓰이는 편이고, ‘우리 학교’ ‘우리 회사’ ‘우리나라’ ‘우리 선수들’ ‘우리 집’ ‘우리네 전통’ 등 모든 표현에 나라는 1인칭보다는 ‘우리’라는 복수 3인칭을 쓰는 경우가 더 많다. 굉장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좋은 말이기도 하지만, 가끔은 이 표현이 갖고 있는 편협한 시선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나는 프랑스에서 살아온 지 17년차 되는 아이 둘이 있는 주부다. 참고로 남편은 벽안의 프랑스인이고, 이곳 프랑스 한 도시의 시청 도시계획과에 근무하고 있다. 가족과 동떨어져서 이곳에 공부를 하러 왔다가 정착을 한 지 꽤 되어서 이제는 이곳이 제2의 고향 같은 곳이 되었지만, 외향상 그리고 나라는 인간의 본연의 바탕에 깔린 기본들은 역시나 영원히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에게 늘 강조하는 것이 바로 ‘다양성의 소중함’이다.

나와 같은 사람은 지구상에 단 한 명도 없다. 그것은 다시 말해 지구상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함을 뜻하는 것이고 어떠한 국적, 종교, 성별, 정치적 성향이든 간에 다양함을 인정하고 존중해 줌으로써 비로소 자유와 평등의 시작이 된다고 믿어왔다.

얼마 전 한국에 친정 나들이를 다녀온 나와 같은 프랑스인 남편을 둔 친구와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한국에서의 외국인에 대한 시선에 관한 것이었다. 예전처럼 주한 미군 위주의 외국인이 아닌, 이제는 여러 나라의 외국인들을 길거리에서 마주칠 수가 있는데, 아직도 외국인을 보는 눈은 이분화되어서 별 진전이 없다는 것이었다. 유럽 계열의 백인을 보면 조금은 동경의 눈빛이고, 피부색이 짙거나 한국보다 경제 후진국의 출신인 경우 당연히 깔보는 시선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남편인 백인과 같이 다니면 절반은 그저 그렇고 그런 직종의 여자 취급을 받기 십상이라는 것이었다.

한 가지 또 다른 문제를 이야기 하자면, 며칠 전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여자 육상선수의 성별문제가 기사화된 적이 있다. 우승을 거머쥔 선수의 성별 확인에 관한 내용이어서 그런지 프랑스 신문에서도 똑같이 그 내용이 다뤄졌다. ‘intersexual’이라고 불리는 2만 명 중 한 명 나올까 말까 하는 남녀 생식기를 체내에 모두 갖고 있는 이들 중에 그가 속했었나 보다. 여자로서 커왔고 그렇게 경기에 임했는데 그 신체구조상의 문제로 이제는 그를 어떤 범주에 넣을지 문제가 되고 있다는 기사였다.

문제는 한국 측 기사의 댓글들이었다. 차마 입에 담기 힘든 내용의 댓글들로 비웃고 희한하게 생각하고 경멸하는 말 투성이였다. 특히나 성정체성에 관한 한 말초신경 자극용의 대화가 되기 십상인 사회에서, 남성도 여성도 아닌 양성자는 그저 동물원의 원숭이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라고 불릴 수 있는 범주에 넣을 수 없다 하여 무조건 경멸하고 소외되는 문화 속에서 과연 그 ‘우리’라는 그룹은 다른 무리와 얼마나 원활한 소통과 교환이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우리’가 아닌 것을 배척한다면, 과연 다른 무리가 ‘우리’를 소외한다 하여도, 존중하지 않는다 하여도 발끈할 기준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 근래 다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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