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을 넉 다운 시키는 부엌에 매이지 말고 끊고 나올 때
‘우리가 스스로 해방되는 날, 세상이 여자를 해방할 것이다’

역시 부엌은 강적이었다. 평소 그렇게 부엌의 함정에 빠지지 말자고 여자들에게 역설해 온 나 역시 부엌에 발목 잡혀 과로로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으니.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여성주간이 들어있는 7월은 나 같은 ‘전국구 앵벌이 강사’에게는 이른 바 대목 기간이다. 렌터카를 타고 장거리 강연을 갔다 오면 강연은 2시간짜리여도 꼬박 하루가 걸린다. 그래도 집에 와서 무조건 쉬고 다음날 나갔으면 괜찮았을 것이다. 여태 그래왔으니까.

그런데 어머니 팔순으로 연로하신 데다가 그림 그리는 시간을 좀 더 많이 갖게 해드리려 하다 보니 내가 ‘가사노동’에 연루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손을 불러다 쓰는 일이 익숙하지 않은 어머니가 한사코 만류하는 데다가 집을 지을 때 잠시 파출부를 썼다가 된통 사기를 당한 전력 때문에 선뜻 사람 쓰자 소리를 못하는 가운데 나는 점점 부엌의 진앙으로 끌려들어갔다.

 병석에 누우니 우선 어머니가 원망스러웠다. 어머니가 그렇게 부엌일에 강박적으로 집착하지만  않으셨어도 내가 숨 좀 돌리고 여유 있게 했을 터이고 그랬으면 과로까지는 안 갔을 것이었다.

어머니는 일종의 부엌 중독증이었다. 아침에 눈만 뜨면 무조건 싱크대 앞으로 달려가 달그락 소리에 물소리를 연신 냈다. 어제 저녁 먹은 설거지 물 빠진 그릇들을 정리하시는 것이다. 아침밥을 먹으면 곧 설거지가 이어지고 바닥에 떨어진 물을 닦노라면 거실청소까지 이어졌다.

그러고 나면 점심이 닥쳤고 지친 노인은 한 술 뜨고 다시 설거지로 돌아갔다. 하루 일과의 종료는 저녁밥 설거지였으니 그야말로 부엌에서 헤어나질 못하셨다. 하긴 60년을 한결같이 부엌에 충성해 오신 분이니 부엌은 어머니의 존재 이유인지도 모른다.       문병 온 친구들에게 나는 부엌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기 바빴다.

‘부엌이 미워’‘냉장고만 없어도 살겠어. 이틀만 소홀히 하면 어느 구석에서 뭔가 썩고 있어’‘냉동고는 진짜 욕심의 피라미드야, 미라가 된 떡들과 정체불명의 가루들이 기약 없이 박혀 있잖아’

나의 발병에 대한 원인분석을 듣고 간 친구 중에 한 명이 밤늦게 문자로 화답했다. ‘부엌을 없애라. 별채 흙집을 부엌으로 만들어. 안 보면 안 하고 일단 쉬게 되거든. 진짜 부엌이 사람 잡는다’  정말 그랬다. 아픈 어미에게 효도한다며 방학을 맞아 호기탕탕 나선 딸애가 어제 마침내 부엌에 백기를 들었다. 팔팔한 22세를 딱 이틀, 여섯 끼만에 보기 좋게 파김치로 다운시킨 부엌의 위력은 가히 공포였다.

“엄마, 별로 한 것도 없이 무지 무지 피곤해.”

“얘야, 잔 펀치에 케이오 당한다고, 집안일은 무수한 제자리 종종걸음과 쉼없는 손놀림으로 여자들의 일과와 일생을 케이오 시킨단다.”

우리 아버지도 딸들에게 생전에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너희는 살림 대충하고 국수나 비빔밥같이 간단한 음식을 즐겨라. 너희 어머니 봐라. 책 한 줄 못 읽는다. 그렇게 살면 백년을 살아도 하루살이 삶이란다”라고. 이 속에는 부엌에 매여 지적 성장이 막혀 버린 아내에 대한 지식 남성의 푸념도 들어 있었을 것이다.

이제 부엌을 지배하자. 매이지 말고 수시로 끊고 나오자. 누가 시켰나? 자승자박, 그러니까 결자해지. 이제 스스로 풀고 나올 일이다. 친구의 문자를 받은 즉시 부엌을 별채로 옮겨버렸다. 별채가 없는 집들은 어떻게 하냐고? 냉장고부터 줄이자. 냉동고부터 싹 비우자.

‘우리가 스스로 해방되는 날 세상이 여자를 해방할 것이다’

1926년 근우회(전국과 해외까지 70여 개 지부를 둔 전무후무한 여성 최대조직)의 선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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