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짱돌을 던질 수도, 돈을 거머쥘 수도 없는 세대. 우리에겐 그 주홍빛 서글픔이 배어 있다.”

지난해 우연히 한 매체의 취재원이 되어 ‘지금의 20대’를 위와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서른 즈음의 ‘우리’는 처음부터 승자독식 게임을 받아들이고 임금 88만원을 받으며 상위 5%의 단단한 직장으로 가기 위해 애써야만 하는 세대다. 물론 불투명하고 악에 가득 찼던 시대가 지난 덕분에, 혼자 고난을 견디며 세상과 싸워야 할 과제를 안고 있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것은 싸움의 대상이 없었던 게 아니라, 모든 것과 싸워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에세이스트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김현진씨는 고등학교 입학 당시 학교의 부당한 체벌에 문제제기 했다가 ‘반사회적이며 다른 학생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학생’으로 내몰려 입학 석 달 만에 학교를 관뒀다.

“아직도 눈을 감고 첫 학교생활을 회상하면 한꺼번에 일곱 번의 따귀를 맞아 뺨이 새빨갛게 부풀어 오른 얼굴로 교사를 쳐다보던, 죽어도 울지 않으려고 애쓰던 10년 전 나의 창백한 얼굴만이 떠오를 뿐이다”(김현진의 첫 책 ‘네 멋대로 해라’ 중)

‘네 멋대로 해라’가 출간된 것이 어느덧 10년 전인데 체벌을 둘러싼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지난 1일 광주의 한 고교생이 교사에게 체벌을 받은 뒤 하굣길에 목을 매 목숨을 끊었고, 지난 3월에는 한 여고생이 영어 과목 쪽지시험 성적이 나쁘다는 이유로 교복 치마를 벗은 채 스타킹 차림으로 꿇어 앉아 있었던 체벌을 받아 논란이 됐다. ‘국가인권위원회’란 기관조차 없어 미흡하게나마 도움의 손길도 내밀 수 없었던 우리 세대와 무엇이 다른가.

체벌이 필요한 상황은 규범이 중대하게 위반된 경우다. 따라서 권위를 갖고 규범을 지키도록 선도하는 입장은 이 상황에서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이때 체벌이 수치심을 불러일으키거나 폭력으로 이어지지 않으려면 ‘절제’가 필요하다.

하지만 체벌을 경험해본 모든 이들이 알고 있듯이, 체벌 상황에서 대부분의 교사들은 개인적인 감정을 동원하거나 매우 흥분 상태에 놓여 있다.

체벌이 교육적이기 위해서는 개인의 감정과 단절된 상황에서, 즉 대단한 절제 속에서 행해져야 한다. 체벌은 교사의 화풀이가 아니라 ‘규범의 구현’이 되어야 한다. 지나친 제재수단의 동원은 스스로의 권위를 허문다.

체벌 상황에서 교사들이 가져야 할 ‘절제’가 한 가지 더 있다. ‘규범’의 절대성 여부다. 지금 통용되는 규범일지라도, 그 규범은 절대적일 수 없다. 교사에게 중요한 규범이 학생들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다음 세대에는 또 어떻게 다르게 적용될지 모르는 것이 규범이다. 이런 스스로의 질문 속에서 교사들은 다시 한 번 절제해야 한다. 이처럼 두 차례의 절제가 있다 해도 그 체벌이 정당성을 지니기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요즘따라 담벼락 너머 학교 안 풍경들이,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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