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인권 소중히 여겨야 남편 아버지 역할 제대로

닷새의 길고 긴 설 연휴 덕에 모처럼 책과 영화에 푹 빠져 지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신문을 장식하는 버락 오바마(Barack Obama)라는 남성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된 것도 황금연휴 덕분이다. 다리에 쥐가 나도록 명절노동을 한 뒤, 잘생긴 이 흑인 남자가 직접 썼다는 2권의 자서전을 야금야금 읽어 내려간 것이 적잖은 위안이 된 셈이다.

알다시피 오바마는 오는 11월에 있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유력한 대통령 후보 중 한 사람으로, 케냐인 아버지와 미국 캔자스 출신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프리카계 혼혈 미국인이다.

이제 47세밖에 안된 혼혈 남성이 ‘검은 케네디’, ‘미국의 희망’이라고 불리며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이유를, 민주당 경선에서 ‘힐러리 대세론’을 꺾고 승승장구하고 있는 이유를 정치·사회·계급·인종·외교·낙태 등 각 분야에 대한 그의 논리적이고도 겸허하며 통찰력 번뜩이는 글을 읽고 난 뒤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재미있게 읽은 대목은 아내와 두 딸과 함께 사는 남편이자 아버지로서의 이야기였다. 연방 상원의원으로 집이 있는 시카고를 떠나 워싱턴에서 사나흘간 정신없이 의정활동을 하다가도 두 딸이 잠들기 전 집에 도착하기 위해 공항을 향해 부리나케 달려가는 ‘소심한’ 아버지의 모습, “집에 개미가 들어왔어” 하고 하소연하는 맞벌이 아내 미셸을 위해 의사당에서 돌아오는 길에 기꺼이 개미약을 사는 소탈한 남편으로서의 모습이 마음에 쏙 들었다.

한술 더 떠 ‘저 남자가 우리나라 대통령 후보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하게 된 것은 그가 맞벌이 부부로서 아이 키우는 어려움을 토로한 대목에서다.

딸 둘의 양육과 일을 병행하는 부모가 세상과 얼마나 치열하게 싸우며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는지, 가정과 일이라는 기로에서 여성들이 얼마나 큰 죄책감을 가지고 고통스러워하는지, 여성들이 일을 선택하는 이유가 단지 자아실현(마초들에 의해 종종 ‘이기심’으로 표현되는)만이 아니라 절박한 생계를 위해서라는 것을 ‘남자’인 그가 알고 있다는 게 더 없이 신통했기 때문이다. 그는 고백한다. “내 삶의 모든 영역 중에서 가장 큰 의문은 여전히 내가 남편과 아버지로서 제 구실을 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라고.

그런데 우습게도 이 대목에서 “내가 딸이 셋”이라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말이 떠올랐다. 지난 1월 이 당선인이 민주노동당을 방문한 자리에서 심상정 의원이 “여성가족부 폐지는 여성의 인권을 소홀히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하자 이명박 당선인이 “(그럴리가 있나요) 내가 딸이 셋”이라며 응수하고 나선 것이다. 이 당선인뿐 아니다.

여성 관련 사안만 나오면 “내가 딸이 몇이다” “딸 많은 집에서 자라서 다 안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우리 어머니”라는 식의 입에 발린 발언으로 자신이 여성문제에 지대한 관심과 안목이 있다는 걸 강조하는 정치인이 한둘이던가.

“내가 딸이 셋”이라는 기사 밑에 수없이 달린 안티성 댓글들을 인용할 것까지야 없다. 딸 많은 집에서 태어나 구박덩이로 자란 여자들이 ‘산 경험’으로 알듯 딸을 많이 키웠대서, 누이 많은 집안에서 자랐대서 그가 여성문제를 간파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므로. 오바마처럼 세상의 각종 차별과 편견, 불합리에 대한 감수성을 지니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만 해법도 발견할 수 있는 법이다.

언제쯤 돼야 대한민국 여성들도 각 당의 여성·가족·보육정책에 대한 미묘한 차이를 저울질해가며 후보 선택을 고민하는 날이 올까. 결혼 전에는 페미니스트라며 헛공약을 남발하더니, 결혼 후 설 명절이 무려 아홉 해가 지나도록 차례상에 올릴 밤 한톨 쳐본 적이 없는 이른바 ‘386 남편’들이 주위에 허다한 걸 보면 ‘그날’이 도래하기는 참으로 멀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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