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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렇지만 젊은 시절에 발표회에 선보인 작품들은 일일이 내가 바

느질한 것들이다. 바느질이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일이기도 하

거니와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이며, 죽을 때까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80년대 초부터 전승공예전에 이 나이가 되도록 꼬박꼬박 출품을 하는 것

도 그런 이유에서다. 주위 사람들은 뭐하러 그런 일을 하냐고 의아해 하

기도 하고, 상을 받기도 하고 못 받기도 하지만 거기에 크게 구애받은 적

은 없다. 내 혼을 한땀한땀 쏟아부을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흐

뭇하고 행복하다.

82년인가 공예전에 출품한 작품은 남미 8개국 쇼를 하러 다니면서 지은

것이다. 아직 KAL이 취항하지 않았을 때라 한 공항에서 너댓 시간씩 기

다렸다 갈아타고 하면서 여덟 나라를 돌아다녔는데, 그 기다리는 시간이

면 으레 공항 대합실에서 바느질을 했다. 졸리면 바느질감을 안고 깜박

잠이 들었다가 시간 되면 후다닥 깨서 다시 비행기를 타곤 했다. 비행기

안에서는 꼭 창 가에 앉아서 일손을 놀리지 않았다. 눈이 많이 침침해진

요즘에도 나는 낮에는 손님을 맞는 틈틈이 작품을 만드느라 바느질을 계

속 한다.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바느질이라면 두번째가 술 마시는

것이다. 젊었을 때는 남에게 쉽게 할 수 없었던 얘기를 하고 보니 나도

이젠 많이 늙긴 늙었나 보다.

내가 술을 배우게 된 것은 한복 패션쇼를 하면서부터다. 나는 쇼할 때는

꼭 신들린 사람처럼 일을 하는데, 쇼란 것이 말하자면 자기 잔치기 때문

일 것이다. 젊은 시절에 패션쇼를 할 때면 나는 1인 10역을 했다. 특히 해

외에 나갈 때면 내가 옷 다 준비해서, 다림질하고, 속옷도 다 갖춰가지고

갔다. 한복을 잘 입으려면 속옷을 제대로 갖춰 입어야 한다. 한복의 속옷

이 얼마나 다양한가. 바지만 해도 짧은 바지, 너른 바지, 겹바지, 홑바지,

단속곳 등이 있고, 치마도 그냥 속치마, 무지기 치마, 데슘치마 같은 것들

이 있다. 이 많은 것들을 일일이 다 챙겨 가지고 갔으니, 대충 웃옷의 모

양새만 잡아주고 장신구만 번듯하니 달아주면 되지 하는 요령을 부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뿐인가. 모델 오디션에서 교육까지 도맡았다. 해외에서 패션쇼할 때면

관객보다도 모델에게 더 신경이 쓰였으니, 저이들이 우리 옷을 남의 나라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하고 보여줄 것인가, 노상 걱정이었다.

옛날이야 해외에 나가기도 어렵고, 돈이 없으니 도와줄 사람 데리고 나

가기도 쉽지 않고 해서 모든 일이 내 차지였다. 오디션부터 리허설, 진행

까지 맡고 옷 입히는 것, 벗기는 것을 혼자 하다시피 한 것이다. 게다가

신발이라도 좀 편한 것을 신으면 될 것을, 다른 사람에게 흐트러진 모습

을 보이기가 싫어 꼭 7센티미터 이상 되는 구두를 신고 왔다갔다 했다.

너무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양주 한 병을 사서

박카스병 열 개에 나눠 담았다. 그리고는 오디션부터 시작해서 쇼가 끝날

때까지 중간중간에 박카스병을 따서 마시는데, 교포들이나 다른 사람들은

내가 얼마나 고단하면 저렇게 박카스를 박스채로 들고 다니면서 마실까

안쓰러워 하곤 했다. 그래 그걸 들고 있다가 내가 피곤해 하고 지쳐있으

면 얼른 박카스를 건네주곤 했다. 술 냄새가 나지 않을 리 없었겠지만 설

마 내가 술을 마셨다고는 아무도 생각조차 못했던 것 같다.

그렇게 패션쇼가 끝나고 나면 발에서 불이 확확 난다. 그럼 호텔에 모셔

다 드릴 테니까 푹 주무시라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나이트클럽에 가자고

했다. 가서 밤새도록 춤을 추고 나면 다음날 아침이면 발 아픈 것이 싹

사라졌다. 지금이야 나이가 들어 놓으니 디스코텍은 못가겠고, 골프를 친

다. 몸 아픈 것을 운동으로 푸는 법을 일찌감치 배운 것이다.

그렇게 술을 마시기 시작해서 나는 애주가가 되었다. 그렇지만 결코 함

부로 마시지는 않는다. 여자가 술마신다느니 하는 소리도 듣기 싫거니와

스스로 흐트러지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남편은 술을 한 잔도 못 마시는

데, 나를 뭐라고 탓하기는커녕 함께 즐거워하신다. 사회생활하는 부인을

이해해서이기도 하겠고, 내가 술을 마셔도 꼭 한두 잔에, 늦어도 밤 9시까

지는 들어오는 등 절제있는 생활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와서는 차마 모델들에게 옷 입히는 일까지는 못하겠다. 그래 며느

리나 딸을 데리고 다니면서 허드렛일을 시킨다.

돌이켜 생각하면 나만큼 복을 타고난 사람도 많지 않지 싶다. 인복도 많

아서 한복하면서 나와 맺어졌던 많은 분들이 꾸준히 나를 사랑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도움을 주신다. 나 자신은 너무 바빠서 친척이고 이웃이고

친구고 한번 찾아 보지도 못하건만, 내가 어려울 때면 도와 주시는 분들

이 많다.

무엇보다도 가족들. 엄마가 돼서 입학식이고 졸업식도 제대로 챙겨보지

못했건만 아이들은 불평 한 마디 없이 잘 자라 제 앞가림 잘하고 산다.

딸은 학자로서 한복 연구에 뛰어들었고, 며느리는 제가 나서서 내 일을

도와 준다. 앞으로 이리자 한복은 우리 며느리가 대를 이을 것이다.

요새도 딸이나 며느리가 쉰다든가 놀러 다니는 것은 어림도 없다. 끊임

없이 공부하고 연구해야지 놀 틈이 어디 있는가. 한복도 양장의 추세를

알아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고 보면 더욱 그렇다. 요즘 딸은 나하고 수의

에 관한 책을 제작하고 있다. 며느리는 무엇보다도 디자인 공부를 열심히

한다. 가게를 할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디자인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

예 며느리집에 가정부를 들여 놔 주고 공부만 하라고 한다. 조금이라도

틈이 나면 미술관에 가서 그림도 보고, 뭐라도 보고 오라고 내보낸다. 본

인이 즐거워하고 잘 따라주니까 가능한 일이다.

남편이 건강하게 현직에 있는 것도 내게는 퍽 고마운 일이다. 비록 보통

의 아낙들처럼 남편 월급을 내 손에 쥐어 본 적은 없지만 한번도 그걸 원

망하거나 불평해 본 적은 없다. 남편은 내가 일을 시작할 때부터 변함없

는 내 동반자며 후원인이었다.

지금 한복계는 과도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요새 개량한복들이 부쩍 많이

나오고 입는 사람들도 심심찮게 눈에 띄는 것을 보면, 개량한복이 이러니

저러니 말들도 많지만, 나는 일단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따지고보면 이

리자 한복 또한 개량한복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는가.

삼국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서민들의 옷부터 궁중의상까지 우리 복식사

를 훑어보면 우리 한복이 얼마나 다양한 디자인을 갖추고 있으며, 얼마나

과학적으로 재단되어 있는지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치마저고리며 바지저고리는 그야말로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반팔 소매도

있었고, 샤링 기법도 있었다.

구태여 개량할 필요도 없다. 그 다양한 한복 패턴에서 시대에 맞는 패턴

을 찾아 좀더 편리하고 아름답게 입도록 디자인해 내놓으면 된다. 디자이

너의 생명은 얼마나 그 시대를 잘 반영해서 창의력있게 만들어 하이패션

화시키느냐에 있는 게 아닐까.

사람의 욕심이란 게 따지면 한이 없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리자가 돈

벌 욕심으로 옷값도 비싸게 받고 했다 하지만 사실 나는 돈에 대한 욕심

은 크지 않다. 운이 좋아서, 남들 안할 때 한복 디자이너로서 출발했기 때

문에 돈과 명예가 따라준 것이라 생각한다. 가장 큰 재산이라면 현재 내

가 가지고 있는 옷감, 자료들, 전시관에 진열된 작품들이다. 이것만 생각

해도 나만한 부자가 또 있을까 싶다.

내가 전시관을 생각한 것은 해외여행을 하면서부터다. 파리의 루브르 박

물관을 갔는데, 그 주변에 사설 박물관이 많은 게 인상적이었다. 진열품도

뭐 대단한 게 아니라 조상이 입었던 옷 한벌에 부싯돌, 담배 쌈지니 안경,

신발, 양말 몇 켤레, 이런 걸 놔두고는 박물관이라 하고 일반 공개를 하는

것이었다. 유럽에는 그런 류의 박물관이 부지기수다. 문화에 대한 인식이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실례인데 그걸 보면서 한복 박물관에 대한 구상을

했다. 그래 옷감도 부지런히 모으고, 인간문화재니 유명한 화가니 하는 이

들에게서 작품도 열심히 받았던 것이다.

또 하나 내가 욕심을 부렸던 것은 내 손으로 사람의 일생을 보여주는 작

품을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었다. 장신구나 옷감을 많이 모으긴 했으나 그

것들은 사실 부수적인 것이다. 더욱 사람의 일생에 관련된 의복 일습이

어느 한 사람의 바느질로 정리되어 남은 것은 없으니, 나는 그 일에 도전

하기로 한 것이다.

'이리자 한복 전시관'은 1996년 9월에 건립되었고, '출생부터 임종까지'라

는 주제로 의복들이 전시되어 있다. 거기에 전시된 작품들은 재료 구입부

터 손질, 염색, 바느질까지 모두 내 손으로 이루어진 것들인데 똑같은 옷

을 열 벌 이상은 만들지 않았다. '작품이란 혼이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서다.

그 중 가장 어려웠던 게 수의였다. 사람이 죽어서 수의를 입는 것을 '염

잡수신다'고 하는데, 복식하는 사람으로서는 필수적인 그 과정을 장의사들

은 공개하려 들지 않았다. 결국은 유희경 선생님에게 고증을 받고, 유진오

박사가 당신 수의를 빌려 주시는 등 학계의 도움을 받아 만들 수 있었다.

나는 자식들에게 우리 내외가 죽으면 그 '염잡수시는' 과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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