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 영양소량'국민에 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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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배운 것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정확한 무게와 중량을 체계화하는 '계량기구의 사용'이었다. 손대중으로 고추, 마늘, 야채, 설탕, 소금 등의 재료를 얼버무려 맛을 내는 한국식 음식 만들기에 익숙했던 현기순은 소량의 소금도 계량스푼으로 재어 넣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미국인들 소금도 계량스푼으로 측정

모든 음식재료들은 계량기구를 이용해 정확한 양을 사용했다. 상황과 컨디션에 따라 다른 맛이란 있을 수 없었다. 병원 급식은 환자의 병명에 따라 재료와 양이 정해졌다. 맛과 영양분이 충분히 고려된 식단이었다.

당시 기순의 눈에 뜨인 계량기구 외의 가정용품은 전기 재봉틀이었다. 발을 쓰지 않아도 자동으로 돌아가는 재봉틀은 너무나 편리하고 속도도 빨랐다. 하지만 옷감을 제대로 움직일 줄 모르면 낭패를 당했다. '아차!' 하는 사이에 재봉틀은 엉뚱한 자리에 실을 박기 일쑤였다. 몇번 실수를 경험한 기순은 이를 악물고 연습을 했다. 얼마 뒤 재봉틀을 훌륭히 사용할 수 있게 되어 곡선 처리가 어려운 목 칼라를 솜씨 좋게 완성하고, 포켓 부분에는 멋진 수를 놓아 학교에 가져갔다. 담당교수가 여러 학생들 앞에서 칭찬을 했다.

"한국 학생이 이렇게 어려운 곳에 수를 놓고, 칼라를 참으로 예쁘게 만들었구나."

그 칭찬 한마디에 얼마나 우쭐해지던지, 언어와 관습의 벽에 막혀 속으로 엉엉 울던 그간의 아픔이 싹 달아나는 것 같았다. 미국 유학 시절, 손재주와 관련된 일화가 한 가지 더 있었다.

"학교에서 요리 시간에 손님 대접을 하기 위해 조그만 파티를 준비할 때였지. 미국인 여학생이 여러 사람이 모이는 식탁 테이블을 장식할 꽃꽂이를 하는데, 꽃을 자르는 가위질도 영 엉망이고, 한눈에 보아도 꽃꽂이가 아니다 싶었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교수님이 내게 한번 해보라고 하지 않겠어. 꽃꽂이라고는 한번도 따로 배운 적이 없었지만, 이것저것 눈으로 보고 배운 대로 가위질을 하고 실습을 했어. 결과는 대성공이야. 교수님은 물론 학우들에게도 칭찬을 받았지. 그 이후 나는 교수님의 권유로 영어로 꽃꽂이 강의를 하기도 했어."(현 교수는 지금도 어딜 가든지 꽃꽂이가 눈에 띄면 그때 일이 떠오른다고 한다.)

기순은 언어와 생활관습의 차이에서 오는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열심히 공부한 결과, 유학을 떠난 지 5년 만에 좋은 결과를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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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중에 미국 무역선 타고 부산에

돌아온 고국은 떠날 때의 모습이 아니었다. 6·25전쟁이 터져 국토는 황폐화되다시피 했고, 가족을 만날 수 있을지도 예측할 수 없었다.

미국으로 갈 때는 비행기를 탔지만 돌아올 때는 전쟁 중이어서 미국의 무역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왔다. 기순이 돌아온다는 소식이 가족들에게 제대로 전해져 있는지, 누군가 그의 귀국을 아는지조차 근심스러울 때 다행히 충청도로 피난을 가 있던 기순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부산까지 마중을 나왔다. 부산항에서의 상봉! 기순은 그때를 자신의 일생 중에 가장 감격스러운 순간으로 기억한다.

부산항은 전쟁으로 발이 묶여 미군의 지휘 하에 미국의 무역선 정도만 입출항이 가능했던 때라 영어를 할 줄 모르면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서울대 영문과를 다녔던 여동생이 미군과 말이 통해 두 사람은 기순이 탄 배 앞으로 올 수 있었다.

미국의 무역선에서 내리자마자 굶주림에 지친 많은 사람들이 함께 내린 미국인들 앞으로 몰려들어 "헬로 찹찹"을 연발하며 먹을 것을 달라고 했다. 눈물이 왈칵 솟았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피난생활을 하고 있는 충청도로 간 기순은 뿔뿔이 흩어진 나머지 가족들을 찾느라 수소문을 시작했다.

기순의 유창한 영어실력과 영어를 전공한 여동생의 노력으로 미군을 통해서 남동생과 연락이 닿았다. 남동생들은 멀리 거제도로 피난을 가 있었다. 남동생들이 충청도로 가족을 보러 왔다. 그렇게 온 가족의 상봉이 이루어졌다.

영어를 못했더라면 가족을 못찾았을 수도 있었는데, 영어를 배운 덕분에 전쟁통에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그때 기순은 교육의 힘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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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수로 임용…가정대학 첫 설립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후 그는 서울대 교수로 임용됐다. 새로운 인생이 그의 앞에 펼쳐진 것이었다. 당시 서울대는 남학생 위주의 단과대학들로 이뤄져 있었는데, 그가 오면서 여학생 위주의 가정대학이란 것이 처음 세워졌다.

"서울대에 가서는 여덟번이나 이사할 만큼 생활이 복잡하고 분주했어. 대학을 세우고 대학원을 신설해서 교육을 하는데, 다른 과목들은 대체로 학문으로 끝나지만 가정학이란 것은 실천하는 것이거든. 실천에 옮기는 그 과정이 참 어려웠어."(인터뷰 도중에 현 교수는 서울대 재직 당시를 회상하며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전란 후 가뜩이나 살림이 어려운 때 영양학을 계몽하고 생활 속에 실천시키기란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이었던 만큼 철저히 행동에 옮겼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성장과 질병 예방을 위해선 영양소량을 꼭 정해야 해!'

그는 가정학회 및 영양학회를 만들어 일차적으로 국민의 '필요 영양소량'을 정하고 계몽에 나섰다. 기초식품군은 처음에는 6가지로 나누어졌다. 그 중에서도 단백질을 충분히 섭취하도록 알려야 했다.

지금처럼 TV가 보급돼 있던 때도 아니었고, 그나마 라디오조차 귀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기초식품군을 널리 알리고 실천시키기 위해 기초식품군을 그림으로 그려넣은 앞치마를 제작했다. 미술대 및 가정대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어렵게 제작한 앞치마를 학생, 주부는 물론, 식당이나 제과점 주인들에게 하나하나 전해주면서 영양소의 필요량을 설명하였다. 실습시간에 학생들은 꼭 앞치마를 입어야 했고 앞치마를 보면서 기초식품군을 암기했다.

그가 이 시기에 애써 홍보한 기초식품군은 세월이 지나면서 6가지에서 5가지로 정리되어 중·고교 가정과목 교과서에 실리면서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이 시기에 그가 한 일은 계량스푼과 계량컵 등 계량기구의 보급이었다.

"명동 입구에 유명한 식품점인 태극당이란 곳이 있었어. 그곳에 계량컵과 계량스푼을 가져다주면서 사용하라고 했지. 태극당뿐만이 아니야. 좀 유명한 식품점은 다 돌아다녔어. 정말 열정적으로 일했지. 유명한 곳에서 정확하게 계량하여 음식을 만든다는 소문이 나면서 중소업체들에게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어. 계량기구의 보급이 제대로 되기 시작한 거야. 가져다달라는 연락을 받았을 땐 눈물이 나려고 하더군."

상류층이 잘 가는 식품점에서부터 시작한 계량기구의 보급은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제과점조차도 눈대중, 손대중으로 조리하던 시절에 그는 미국에서 보고 배우고 익힌 대로 계량기구의 필요성을 알리면서 어렵게 만든 계량기구들을 제과점, 식당, 가정 등지에 나누어주었다.

 

저축생활 중앙발표대회 시상식에서 축사하는 모습.(조흥은행강당, 1977. 9.1)free prescription cards sporturfintl.com coupon for cial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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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량기구 보급되자 단체급식 혁명에 나서

계량기구의 보급이 생활 속으로 파고 들어가면서 그는 이제 단체급식에 눈을 돌렸다. 미국에서 영양사의 지시대로 보급하던 식단을 눈여겨본 후 한국에서도 여러 사람의 건강을 좌우하는 단체급식에 대한 혁명을 꼭 이루리라 속으로 다짐하곤 했다. 먼저 한 것이 병원 급식이었다.

그는 병원 급식을 환자에 따라 보통식, 죽식, 유동식으로 나눴다. 그 외에 병명에 따라 특별식을 추가해 이 환자는 특별히 뭐를 더 줘야 한다거나 빼야 한다는 식의 병원 급식의 기본틀을 만들었다. 당시에는 식이요법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 특별식의 개념이 없었기에 위장병 환자에게도 고춧가루를 넣은 음식이 예사로 제공되던 때였다. 이렇게 만든 병원 급식의 기본틀은 메디컬센터에서 실천되기 시작했다. 그 다음 단체급식은 군인 급식이었다.

"먹을 것이 모자랐던 시절이긴 했지만 군인들의 식생활은 영 말이 아니었어. 무나 오이가 반찬으로 많이 나왔는데 단백질 섭취와는 영 거리가 있었어. 그래서 단백질을 포함해 군인 급식에 필요한 영양소량을 만들어 정부에 건의했지. 정부는 최대한 받아들이려고 노력을 했고, 군인 식단에 약간의 변화를 주기 시작했어. 어렵게 일한 보람들이 솔솔 마음 속에 느껴지던 때였지."

특히 월남전에 파병된 우리 국군들이 먹는 식사는 대부분 미군 입맛에 맞게 짜여진 식사여서 파병군인들이 현지에서 많이 고생하던 때였다. 느끼한 고깃덩어리가 들어간 통조림이 주식이었다. 파병군인들은 어지간히 비위가 좋지 않고선 음식을 먹지 못해 배를 곯았다.

현 교수는 월남전에 파병된 군인들을 위해 밥과 김치, 생선 위주로 된 한국식 통조림을 만들었다. 그의 헌신적인 연구와 노력으로 월남에 파병된 국군들이 김치와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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