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적 올바른 길은 여성 유권자 정치세력화

이제 대통령 선거를 3개월 남겨두었다. 정권교체의 시기라 언론과 시민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정치적'이 되었다. 특히 후보 경선과정에 여성이 포함되어 있어서 많은 여성들이 관심 있게 지켜보았을 것이다.

매번 선거 때마다 여성운동을 비롯한 여성계의 화두는 단연 여성의 정치세력화(political empowerment)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여성운동은 생활정치라는 슬로건 아래 여성들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활동을 전개해 왔다. 생활정치는 여성들의 사적인 영역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들이 정치를 통해 사회적인 이슈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여성적 관점을 가진 지방의원 후보들이 당선되기도 했다.

이제까지 여성의 정치세력화 운동은 보다 많은 수의 여성정치인의 등용에 초점이 두어진 것이 사실이다. 한국의 정당정치가 인물이나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어 여성들이 정치영역에 진입하는 것이 어려운 현실이라 여전히 유효한 전략이다. 지난 국회의원 선거에서 맑은정치여성네트워크의 활동은 결과적으로 여성의원의 괄목할 만한 증가를 가져왔다.

하지만 이 활동을 두고 여성 정치세력화 운동이 과연 여성주의적 기준으로 수행되고 있는지에 대해 문제 제기가 있었다. 또 정치적 성향보다는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는 일관성 없는 기준으로 정치세력화 운동을 진행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다. 한편에서는 지나치게 낙후된 여성의 정치적 대표성을 높이기 위해 현실적으로 취할 수 있는 전략이라는 입장도 있어 앞으로 논쟁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선거 과정에서 보다 많은 여성의 등용에 초점을 두는 정치세력화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는 여성유권자들의 정치세력화이다. 세력화란 반드시 집단이나 조직을 이루어 단체행동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개인 여성들의 투표권이 후보들을 긴장시키고, 선거의 당락에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비근한 사례로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초선에서 승리할 때, 낙태에 대한 보다 진보적인 관점이 여성유권자들의 표심을 움직였다. 낙태를 둘러싸고 찬반 논쟁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지만 많은 여성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는 선거 결과를 통해 나타난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라는 오랜 여성주의 슬로건의 유효함을 절감하는 대목이다. 한국의 정당정치에서 보면 여성 비하 발언이나 평등에 역행하는 정책을 입안해도 정치인들은 건재하다. 이를 보면서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여성유권자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으면 과장일까.

여성유권자의 정치세력화를 위해서는 선거공약에서 나타나는 후보들의 여성 관련 정견의 차이가 선거 결과의 차이를 가져올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선거마다 후보들의 공약은 언론과 시민사회에서 평가된다. 최근에는 매니페스토 운동을 통해 실현 가능한 공약의 정착을 위해 노력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선거 때마다 후보들의 소속 정당이나 정견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여성 관련 공약은 신기할 정도로 비슷하다. 지난 대선에서는 호주제 폐지를 둘러싼 공약에서 약간의 차이들을 보였으나, 이것이 여성유권자들의 표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미지수이다. 가장 일반적인 공약들은 여성할당제와 보육정책이다.

여성할당제는 물론 요직의 여성 등용이 가지는 상징성이나 장기적인 파급효과는 있다. 이 공약은 대다수 여성유권자에게보다는 정치와 관직에 뜻을 둔 일부 여성들에게 체감의 정도가 훨씬 높을 것이다. 보육정책의 대상은 엄밀히 말하면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와 어린이다. 이 공약이 여성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변화를 가져올 것인지를 고려해 기획된 공약이 아닐 때 여성유권자들에게 다가가는 체감지수는 그리 높지 않을 것이다.

후보들에게는 통념상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선언적인 여성 관련 공약이 아니라, 현재 우리 사회의 여성에 대한 차별을 어떻게 시정할 수 있을지, 그 과정이 수많은 가부장적 세력들과 충돌하고 반격에 직면하더라도 끝까지 추진할 의지와 청사진이 있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여성들의 고용 불안정과 차별, 틈만 나면 고개를 드는 남성 할당제나 군가산점제 부활, 일상에서 여전한 성폭력 문제 등, 후보의 정견이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는 공약을 끌어내 사회적인 관심을 높여야만 여성유권자들의 정치세력화가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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