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서약, 구체적 약속으로 바뀐다

“보나야, 퇴임 후에는 당신만을 위해 살게. 운동도 열심히 하고 집안 청소도 스스로 할게”

“당신의 생일, 결혼기념일, 아들생일, 크리스마스 등 1년에 4번 문화공연 예약을 하고 함께 즐기도록 하겠습니다. 문화공연비는 2,3차 술자리에 가지 않는 돈으로 마련하겠습니다.”

“승진씨 사랑해. 맞벌이 하면서 힘들다고 투정만 부려 미안해요. 당신이 가장으로 힘낼 수 있도록 앞으로 아침밥은 꼭 챙겨 드릴게요.”

“지숙씨, 힘들었지? 벌써 결혼한지 23년이 되었구려. 결혼 기념일을 잊지 말고 즐거운 기념일로 만들도록 노력할게요.”

지난 15일 서울 인사동 거리에 설치된 부스에는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들로 넘쳐났다. 한국 매니페스토실천본부(상임대표 강지원)는 5월21일 ‘부부의 날’을 기념해 지난 11일부터 중년부부들을 대상으로 상대방에게 감사의 인사와 함께 지킬 수 있는 약속을 하는 ‘부부 매니페스토 Re프로포즈’를 실시해 큰 호응을 얻었다.

지난 주말 어느 결혼식장에서도 이색 광경이 펼쳐졌다. 매니페스토실천본부 이광재 사무국장은 직접 본인의 결혼식에서 매니페스토 운동을 실천했다. 그는 “장모님께 사위 아닌 아들 노릇 하겠습니다. 아이가 생기면 기저귀는 제가 빨겠습니다. 몰래 ‘야동’ 보지 않겠습니다” 등의 공약을 발표해 웃음을 자아냈다. 아내 오현순씨도 “시어머님께 며느리 아닌 딸 노릇 하겠습니다. 활동가의 아내로서 부동산에 과한 욕심 내지 않겠습니다” 등의 선언을 했다.

목표, 이행 가능성, 계획 등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참공약 운동 매니페스토. 선거에서 후보자들의 공약을 검증하기 위해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매니페스토 운동이 이제는 부부생활로 성큼 들어왔다.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는 지난 3월 한국웨딩플래너협회와 협약식을 맺었다. 웨딩플래너협회는 앞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부부들에게 추상적인 성혼성언문보다 구체적인 약속을 선언하는 결혼 매니페스토를 권장할 방침이다. 협회측은 “아직 결혼 매니페스토가 확산된 단계는 아니지만 젊은 부부들을 중심으로 동참자가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얼마 전 결혼식을 올린 이병길(30)·설다영(28) 부부는 결혼에 앞서 자산관리, 건강, 성, 가사 및 육아, 사회공헌, 문화생활, 부모공경 등 세부항목을 정해 꼼꼼히 평가하고 미래 계획을 세웠다. 그 과정을 거친 후 부부는 선언문을 만들어 결혼식장에서 하객들을 증인으로 해 이를 선언했다. 설씨는 “결혼 전 했던 많은 약속들은 그냥 잊어버리기 쉬운데 문서화하고 공증을 거치면서 두 사람 사이의 약속으로 자리 잡게 됐다”며 “이밖에도 선언문을 만드는 과정에서 남편과 많은 대화를 하게 되고 서로 더 잘 알게 돼 효과가 컸다”고 말했다. 

이광재 사무국장은 “해체가정이 늘어나는 등 한국 가정이 위기에 직면했기 때문에 부부간 작은 약속부터 실천하는 매니페스토 운동이 주목을 받는 것 같다. 특히 신세대 여성들은 매니페스토 결혼식에 매우 적극적”이라고 설명했다.

“부부 매니페스토 운동은 여러 가지 특징이 있지만 특히 여성운동적 측면이 강합니다. 사실 지금의 결혼문화는 남성 위주로 여성들에게 많은 희생과 양보를 요구하죠. 하지만 부부 매니페스토 운동을 하게 되면 남편과 아내가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에게 필요한 부분들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여성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고, 가정 분위기도 한쪽이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단계에서 서로 함께 만들어가는 단계로 바뀌게 됩니다.”

이 국장은 “매니페스토 운동이 부부문제에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하지만 소통의 장을 마련해줄 수는 있다”며 “이번 부부의 날은 부부가 마주 앉아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지킬 수 있는 작은 약속부터 건네보라”고 제안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곽배희 소장은 “서로 지킬 수 있는 약속을 하는 부부 매니페스토 운동은 더 나은 부부관계를 위해 노력한다는 측면에서 바람직하다”며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지 말고 제대로 의미를 알고 실천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병길·설다영 부부의 8대 매니페스토

1. 자산관리       총소득 50% 저축

                      소득관리 창구 단일화

2. 건강             절주, 금연, 주기적 운동, 연 1회 종합검사

3. 가사 및 육아  2자녀, 공동가사 및 육아

4. 사회공헌       자원봉사자 활동, 기부

5. 성생활          충분한 대화 후 동의 하에 진행

                       부부 외 성관계 불가

6. 문화생활       월1회 이상 공동 문화생활

7. 개인존중       개인의 프라이버시 존중

8. 부모공경       양 부모 월 1회 이상 방문, 주 1회 이상 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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