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들의 뮤즈가 될 시간이 없어요”

“역사를 기술하는 이들이 남자들이기 때문에 남성의 인생은 ‘역사’가 되고 여성작가들의 삶은 ‘가십’이 되어 왔다.” 초현실주의 여성예술가들을 연구한 휘트니 채드윅이 한 말이다.

2002년 프랑스 퐁피두 미술관에서 있었던 ‘초현실주의 혁명 La Revollution Surrealiste’전은 이 사실을 다시금 확인토록 한 것이었다. 미술관 전관에 걸쳐서 60여명 작가들의 작품 600여점을 망라한 초대형 회고전임에도 불구하고 그 중 여성작가들의 작품은 불과 10여점에 불과했다. 당대에 함께 활동했던 대략 21명의 여성작가들 중 레오노라 피니, 자클린 람바, 메레 오펜하임, 도라 마르, 레메디오스 바로 등 몇몇 작가의 작품 한두점씩이 전부였다. 만 레이가 1934년에 찍은 최초의 초현실주의 공식사진 속에도 그녀들은 공식적으로는 없다. 다만 그들의 뮤즈 혹은 연인으로 비공식적인 스냅사진에나 존재할 뿐이다.

역사 뒤에 가려진 수많은 그녀들 중에 레오노라 캐링턴을 기억한다. 캐링턴의 삶과 예술은 초현실주의 동료들이 진정한 혁명가라고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브르통은 “야생성과 영리함을 고루 갖추고 끊임없는 상상력을 발동하던 그녀가 만일 중세에 태어났다면 마녀로 처형되었으리라”고 말했다는데, 중세의 마녀란 독립적이고 아름다운 여인들이 아니었던가.

영국의 엄격한 가톨릭 부르주아 가문에서 태어난 캐링턴은 수도원 학교에 보내졌지만 기이한 동물들 낙서만 일삼다가 반항적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쫓겨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거꾸로 글쓰기를 하던 그는 14세 때 한 사제 앞에서 치마를 들어올리며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했었단다. 물론 치마 속에는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채.

보수적 부르주아 놀려먹기를 즐겼던 캐링턴은 친구와 함께 호텔 로비의 우아한 부인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큰소리로 매독에 관해 떠들며 다녔다고. 놀란 가족은 그를 더욱 엄격한 학교에 보내지만 이번엔 도망치기를 반복했다. 사교계에 데뷔시켜 결혼시키려던 부모의 뜻을 저버리고 책만 읽다가 마침내는 예술가가 되겠다고 선언한다. 미술학교 재학시절 런던에 전시하러 온 초현실주의자 막스 에른스트를 만나 눈이 맞아버렸고 함께 파리로 도망가서는 그들 그룹에 동참한다. 에른스트는 그녀를 ‘바람의 신부’라고 불렀다 한다.

말과 하이에나로 표출되는 자연의 생명성

캐링턴의 독특한 정신세계를 만든 것은 아이리시인 유모가 매일 밤 얘기해주던 켈트 신화와 신비로운 마법의 세계였다. 직접 그린 자화상에는 이러한 세계가 녹아 있다.

마치 마술사 같은 의상을 입고 푸른색의 빅토리언 의자에 앉아 있으며 머리카락은 욕망처럼 밤바람에 흩날린다. 머리 위를 날고 있는 유년의 목마는 창밖으로 나가 달빛 속으로 달려간다. 말은 켈트 신화에서 성스러운 동물이며 바람보다 빨라 공기까지도 뚫고 날아갈 수 있는 빛의 동물이라 여겨진다.

그 앞엔 영물과도 같은 하이에나가 서 있다. 윤기 나는 검은 털을 지닌 하이에나는 그의 분신처럼 영롱하고 깊은 눈으로 정면을 쏘아보고 있으며, 입가에 보일락 말락 미소를 띠고 있다. 아르테미스처럼 젖가슴을 달고서.

말은 낮의 부활을, 하이에나는 밤의 심연을 상징한다. 여인은 긴 검지손가락으로 하이에나에게 주술을 걸고 있고, 그 뒤에는 그림자로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희미한 영체가 있다. 자연이나 동물들과 피부로 대화한다고 말하곤 한 그는 이 영적 동물들을 매개로 거대한 자연의 생명성과 연결된다.

캐링턴과 함께 프랑스 아비뇽 남부 생 마르탱 다르뎃슈에 살던 에른스트는 세계대전이 터지자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체포된다. 홀로 남겨진 캐링턴은 미쳐버릴 듯한 불안과 공황 속에 살던 집을 위스키 한병과 바꾸고 스페인 국경을 넘어 마드리드에 도착했지만 신경병과 환각으로 미쳐갔다.

“엄청난 고통이 시작되었다. 간병인들은 젊은 처녀를 벌거벗긴 채 침대에 묶어 놓았고, 그녀가 똥오줌을 싼 채로 누워 있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간질병을 유발하는 카르티아졸을 주사했다.”

극적으로 병을 이긴 캐링턴은 아프리카의 폐쇄시설에 그녀를 감금하려던 아버지의 감시로부터 탈출, 멕시코 대사관으로 도피했고 외교관이던 동료와의 위장결혼으로 미국으로 이주, 멕시코에 정착했다.

캐링턴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 이미 자유의 몸이 되어 세계적인 부호이자 미술 컬렉터인 구겐하임의 품에 안긴 에른스트와 재회하지만 둘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었다. 구겐하임은 당시의 캐링턴을 이렇게 회고한다.

“그녀는 막스와 함께하는 삶이 지나갔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그의 노예가 되는 것이 그녀가 그와 함께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지만 이제 더 이상 그의 노예가 되는 것이 그녀에게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캐링턴의 예술성은 에른스트를 떠나서 비로소 개화한다. 신비로운 동식물로 가득차 있던 유년의 주제들은 켈틱 신화와 마법, 연금술을 주제로 보다 영적이고 비의적인 세계로 무르익었다. 그것은 환영이나 환각이 아니라 감성의 예술이었다.

‘마술을 모르고, 밤의 두려움을 모르고, 지성 외에는 영적 힘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에게 길을 이끄는 예술, 살아있는 초현실주의 신화 캐링턴은 이렇게 말한다.

“난 그들이 누구이건 그 사람의 뮤즈가 될 시간이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