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적 뚜렷한‘소통령’
역대 영부인중 가장 고학력·고령
젠더 이슈 직접 제기하고 움직여
필자가 지난해 겨울에 한국정책학회 동계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이희호 여사는 단임 임기를 보냈던 1980년 이후 영부인들 중 가장 훌륭한 영부인으로 꼽혔다. 유형별 분류에서 이 여사는 ‘뚜렷한 업적형“ 영부인에 속한다.
대한민국의 퍼스트레이디로서 이 여사는 젠더 이슈를 직접 제기하고, 그것을 움직여나간 첫 영부인으로 꼽힌다. 국민의 정부에서는 여성운동가 출신 대통령 영부인이라는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여성 관련 이슈들이 쉽게 풀렸다.
이 여사는 대통령 영부인의 정례적인 단독 해외순방 영역을 개척한 첫 영부인이기도 하다. 비록 전임 손명순 여사가 단독으로 베이징 여성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지만 1회에 그쳤다. 반면 이 여사는 단독의 정례적인 해외순방 외교활동을 벌였다. 미국의 카터 전 대통령 부인 로잘린 여사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독자적인 해외순방을 한 것과 유사하다.
이 여사는 또 역대 영부인 중 가장 고학력의 대통령 영부인이다. 이화여전에다 서울대, 그리고 미국 스칼렛대 석사 출신의 유학파로 영어가 능통하다. 고교 졸업 후 고학을 했던 남편과 대조적인 학력이다. 이 여사는 퇴임 후에도 재임 중 만들었던 영부인 사업인 ‘사랑의 친구들’과 ‘한국여성재단’의 명예총재와 명예고문 등 다양한 분야의 명예직을 맡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이 역시 대통령 영부인으로서는 최초의 일이다.
이 여사는 역대 영부인들 중 가장 고령의 나이인 76세에 청와대 안주인이 되었다. 만일 이 여사가 10년만 젊은 나이에 영부인이 되었다면 우리나라 퍼스트레이디의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재임시절 논의됐던 ‘엘리노어 프로젝트’도 좀더 활성화되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집권 중반기 이후 옷로비사건과 두 아들이 구속되는 사건들이 이어짐으로써 이 여사가 대통령 영부인으로서 사회와 국가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와 활동영역이 많이 축소됐다. 또한 한 개인으로서도 마음의 상처를 입고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 여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이 되기 전부터 독자적으로 활동해온 한국 사회의 여성지도자였다. 이 여사의 삶은 40세 이전에 여성운동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던 시기, 40대 이후 정치인 김대중의 아내로서의 내조기, 76세 이후 영부인 재임기, 그리고 퇴임 이후 등 4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한 여성의 입장에서 볼 때 그는 40대 이전의 ‘히히호호’ 시대가 가장 찬란한 시기였을 것 같다. 연극의 극본은 물론, 주인공에다 연출까지 맡아 활동하면서 ‘21세기의 김활란’을 꿈꾸던 그 시기 말이다.
그러나 공인으로서 이 여사의 삶은 40대 이후에 더욱 빛난다. 결혼 이후 겪은 풍상으로 활달한 개성은 사그라들어갔지만 대신 이 여사는 ‘김대중’이라는 남자를 통해 더 큰 관점에서 자신의 꿈과 이상을 실현할 수 있었다. 이 여사에게 김 전 대통령은 남편이기에 앞서 독재에 맞서 조국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지키려는 수호자였고, 이 여사는 그 수호자의 ‘동역자’였다. ‘이희호 없는 김대중은 없다’는 말 자체가 이희호 인생의 의미를 더해주고 있다. 이 여사도 저서 ‘나의 사랑, 나의 조국’에서 “일생을 그에게 아낌없이 바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조국을 사랑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DJ의 동교동 자택 문패에는 ‘김대중 이희호’라고 부부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다. DJ, 이희호 부부가 서로를 평생의 동지이자 반려자로 생각하고 있음을 이 문패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