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당시 처녀가 아니였죠”
“사건 당시 처녀가 아니였죠”
  • 정미경 / 수원지검 여성가족부 파견검사
  • 승인 2007.02.23 15:47
  • 수정 2007-02-23 15: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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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강간피해자 수치심에 둔감한 우리 사회
왜 모욕감 느끼는지 털끝만큼도 생각 안 하는 법조현실에 분노
몇해 전 내가 공판검사로서 담당했던 사건 중에 강간사건이 있었다. 피해자는 20대 초반의 여대생으로 당구장에서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고, 가해자는 그 당구장 주인의 친구인 40대 남자였다. 그녀로부터 매번 거절당하자 그는 꾀를 내어 그녀를 밖에서 만날 계획을 세운다. 친구인 당구장 주인을 핑계 삼아 셋이서 식사를 함께 하자고 했다는 거짓말을 해 그녀를 불러낸 것이다. 주인이 조금 늦는다고 기다려달라고 했다는 그 남자의 말을 그대로 믿은 그녀는 남자가 권하는 한잔 두잔에 취하게 되었고, 시간은 어느새 자정을 훨씬 넘고 있었다. 계획한 대로 그녀를 집으로 데려다 준다고 유인하여 자신의 차에 태운 다음 그녀의 집과는 반대 방향으로 차를 운전하여 갔다. 인적이 없는 한적한 공터에 차를 세우고, 차 안에서 그녀를 강간한다.

사실관계는 이렇게 단순하나 그 남자의 변명은 복잡하다. 그는 그녀가 처녀가 아니고, 평소 남자관계가 복잡하고, 성행위를 즐기는 여성이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화간’이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그녀가 자기와 성행위를 하면서 즐거워하기까지 했다는 말도 했다.

어쨌든 남자는 강간죄로 구속되고, 기소된다. 피고인의 인권보장은 지켜져야 하기 때문에 법정에서 남자의 변명은 말뿐이 아니라 말에 권리라는 날개까지 달고 춤을 춘다. 단지 증인으로서만 진술하게 되어 있는 피해자인 그녀는 소극적으로 묻는 말에 대답할 뿐 적극적으로 자신의 말을 펼쳐 보일 수 없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그녀가 울음을 터뜨린다. 남자의 남성 변호인이 말한 “증인은 그 당시 처녀가 아니었지요. 그 전에 성경험이 몇번이나 있었나요”라는 질문에 꽃다운 가슴이 무너져내린 것이다.  

검사석에 점잖게 앉아있던 나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의제기를 했다. 변호인이 사실과 관계없는 추측성 질문으로 증인에게 모욕감을 주는 질문을 하고 있으니 제지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바로 그 다음, 그 변호인이 즉각적으로 반론을 제기하고 나섰다. 놀랍게도 “검사님은 왜 모욕감을 느끼시나요”였다. 그 순간 소위 “황당하다”는 말 이외에 다른 말이 필요없었다.

“왜 모욕감을 느끼느냐고요, 차라리 ‘왜 여자로 태어났니’라고 물어보시지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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