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로...민간외교관으로...든든한 그림자 역할 ‘톡톡’
부잣집 셋째딸서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아내로
축첩 타파· 부부동반 문화 만들기에 애써

유언으로 남편인 이승만 대통령이 독립운동 시절 사용하던 ‘바른 태극기’를 자신의 관에 넣어달라고 부탁했던 프란체스카 여사. 아들 이인수 박사(정치학)· 조혜자 부부는 “어머님께선 아버님을 뵈러 매주 금요일 국립묘지에 가시곤 했는데, 80년대 초 거기서 만난 한 오스트리아인이 어머님께 ‘오스트리아인이시죠?’했더니 대번에 ‘아니요, 난 한국인이예요’하실 정도로 한국 사랑이 끔찍하셨다”고 회상한다. 그런만큼 이들은 ‘오스트리아’(Austria)와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 호주)를 구별 못하고 편의대로 프란체스카 여사를 ‘호주댁’으로 불렀던 한국 국민의 무신경이 지금도 안타깝기만 하다. 시정 물가를 몰랐다던가 한국어를 배우려 하지 않았다는 것,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과잉보호로 인의 장막을 쳤다는 등 세간에 떠도는 프란체스카 여사에 대한 이런 저런 소문에 대해서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혈육으로서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초대 대통령 부인으로 기록되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90여 년 삶을 이화장의 이인수· 조혜자 부부의 증언을 중심으로 여러 자료를 취합해 재구성해본다.

결혼 이전

프란체스카 도너는 1900년 6.15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생장했다. 중고시절 수학성적은 ‘수학의 진주’라는 애칭을 얻었고 상업 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영국 스코틀랜드에 3년간 영어 연수를 하여 영어 통역사자격과 타자-속기자 자격을 취득하였고 모국어인 독어와 불어를 구사하고 철물 무역과 청량음료 공장을 운영한 아버지 사업의 후계자로 현장 수업을 받아 행정과 사무의 능력을 고루 갖추었던 학식과 교양을 갖춘 부잣집 셋째 딸이었다.

이승만 박사를 만나다

1933년 2월 어머니와 함께 파리 경유 스위스 여행길에 레만 호반의 뤼씨 호텔엘 묵었다. 국제 연맹 회의에 참석하는 세계 각국 사람들로 호텔식당은 만원을 이루고 있었고 프란체스카 모녀가 앉은 4인용 식탁 빈자리로 이승만 박사가 합석하게 되었다.

이 박사는 이틀 동안 국제연맹이 다루는 일본의 만주침략 건과 관련하여 만주의 한국동포들이 일제의 학정에 시달리는 사연을 홍보하고 극동의 평화를 위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러 미국서 급히 날라 와 국제연맹 방송, 각국 대표와 신문기자들과의 면담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중이었다.

프란체스카가 다음날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이승만의 전면 인터뷰 기사와 사진을 보고 이승만을 위해 스크랩해서 호텔 안내에 전하고 또 다른 신문에 난 기사도 잘라서 보내자 답례의 차대접으로 발전했다. 프란체스카 어머니는 여행을 중단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으나 프란체스카는 제네바의 이승만과 서신 연락을 계속했다. 7월 초에는 소련 입국비자를 받으러 비엔나에 온 이승만과 재회할 수 있었다.

프란체스카는 일손과 돈이 한없이 필요한 이 독립투사를 위해 자기의 시간과 능력을 제공하였고 마침내 1년 3개월을 지나 두 사람은 34살, 59살로 사랑하는 가족의 반대와 한국인 동지들과 동포들의 반발을 받으며 1934년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반지도 여자가 준비했다.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아내로 험난한 인생행로를 시작하는 것이다.

1910년 한국 최초의 미국 박사학위를 얻은 이승만은 미국 정관계, 언론계를 통해 일제의 학정을 알리고 한국의 자주독립을 호소하고 있었다. 1913년부터 39년까지 하와이를 근거지로 민족교육과 홍보활동을 통한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1918년 기독교를 통한 한국민족의 갱생을 목표로 한인기독교회(KCC)를 세우고 선교단을 만들어 하와이 뿐 아니라 아이오와, LA로 확산시켰고 또 한국 민족화를 위해 기독교 학교인 한인 기독학원을 만들어 하와이 일대에 있는 청소년들에게 민족교육과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한편 1921년에는 독립운동단체인 대한인동지회를 조직하였다. 1919년 3.1 독립만세 때 서재필과 함께 필라델피아 한인대표자 대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20년에는 상해에 가서 임시정부 대통령 직무를 수행하였다.

독립운동가의 아내가 되다

결혼 직후 하와이 동포들은 서양부인을 데리고 오지 말라고 전보를 두 번씩이나 쳤으나 이 박사는 아내와 같이 승선을 했다. 프란체스카는 수심 가득했던 어머니 얼굴을 떠올리며 눈물을 많이 흘렸다. 부두에는 뜻밖에도 수많은 동포들이 나와 마중을 했고 1천명이 넘는 하와이 동포들이 큰 잔치도 벌여주었다.

호놀룰루에서의 생활이 시작됐다. 첫 번째 한 것이 한국말을 배우려 노력하고 한복을 입고 김치를 담구는 것이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주부로 안주할 수가 없었다. 세 기관을 움직이는 남편을 따라 할 일이 많았고, 특히 한인기독학원의 실무를 지원했다. 학생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아이들 머리도 감겨주고 식사도 준비했다.

대한YWCA 고문을 한 박에스더는 10살부터 한인기독학원 기숙사 생활 중에 일본으로부터 빼앗긴 주권을 찾아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는 교장선생의 외침이 어린 마음에도 민족에 대한 어떤 자각심을 싹트게 하였다고 회상하고 있다.

이박사 내외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워싱턴 D.C.로 옮겼다. 41년에 이 박사는 태평양 전쟁을 예언하는 영문 저서 ‘일본 군국주의의 실상’(Japan Inside Out)을 발간하여 미국 국무부와 의회에 경고를 주었고 ‘대지’의 작가 펄벅 여사는 “무서운 예언서”라고 평가했다. 세 번의 타이핑에 아내의 손끝은 무르고 터졌다. 베스트셀러가 되자 독립운동 자금도 많이 확보할 수 있었고 아내에게도 여윳돈을 주어서 이때 맞춘 검정 예복이 40년을 넘어 며느리가 물려받아 입고 있다. .

이 박사의 집은 지식인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이들이 공통으로 말하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인상은 “웃음으로 반짝이는 눈, 남편에 대한 사랑의 충만, 남편과 남편의 일에의 전력투구”를 꼽고 있다. 프란체스카는 미모와 능란한 사교로 워싱턴의 저명인사의 부인들과도 교제를 했다.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생활은 내핍과 검약뿐이었고  독립운동을 위해 밤낮없이 넓은 미국 땅을 이동할 때 프란체스카는 운전을 담당하였으며 무릎 담요는 온기 없는 차에서 남편을 기다릴 때의 필수 품목이었다.

45년 해방되던 날 이승만 박사는 워싱턴의 신문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아내의 지혜와 용기, 인내와 슬픔, 노력이 나로 하여금 오늘 이날을 맞게 했다”고 하며 아내의 은공을 높이 치하하였다.

해방 대한민국에서 남편이자 대통령의 일등 비서가 되다

53년 11월 13일 정원사를 방문한 리처드 닉슨 미국 부통령 부부와 함께 한 이승만 대통령 부부. 프란체스카 여사는 막힘없는 영어 구사력으로 6·25 전쟁 전후 세계 각지에 구호를 요청하는 등 민간 외교관 역할을 활발히 수행했다.
▲ 53년 11월 13일 정원사를 방문한 리처드 닉슨 미국 부통령 부부와 함께 한 이승만 대통령 부부. 프란체스카 여사는 막힘없는 영어 구사력으로 6·25 전쟁 전후 세계 각지에 구호를 요청하는 등 민간 외교관 역할을 활발히 수행했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자 이박사는 긴 해외생활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신탁통치반대, 모스크바 3상결정 취소 요구, 국토분단과 공산테러, 폭력, 혼돈이 난무하는 미군정 치하에서 이 박사는 좌우합작을 강요하는 하지중장과 결별을 선언하고 민족자결주의를 표방,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제헌국회구성 총선거가 유엔한국임시위원단 감시아래 48년 5월 10일 실시하여 198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했다.

프란체스카는 처음 돈암장에 거주하고 다음해에 마포장으로 2개월간 이사했다가 10월에 이화장에 정착한다. 그녀는 한국이 독립하여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아담한 내 집을 갖는 것이 꿈이어서 “돈암장의 안마당 청소하던 때가 제일 행복했다”고 기억한다.

해방 당시 훈련된 비서가 없었던 시절로 남편의 영문 구술에 따라 외교 문서를 타자기로 쳐서 정리하는 일이 많았다. 요인 암살과 정치인에 대한 총격이 난무하던 이 시기에 70세의 이승만 옆에는 프란체스카 여사는 총받이로 자처하며 붙어 다녔다.

영부인 시절 축첩 타파에 힘써...임영신 초대 상공장관 임명에 영향력

 

1948년 8.15일 대통령 취임으로 서양계 영부인에 대한 비판이 들끓었다. 그녀는 꿋꿋했다.

대통령이 된 후 미 군정으로부터 모든 것을 이양받는 과정에서 프란체스카 여사가 타이핑은 도맡았다.

경무대 안주인이 되면서 한 가지 관행을 바꾸려 애썼다. 손님을 초대할 때 부부 동반을 원칙으로 했다.  남자들의 회합에 기생이 노래와 춤을 하고 첩이 동행하는 풍습을 바꾸려 한 것이다. 축첩을 금지하는 내용을 임시국회 첫 회기에 반영시키려 하였다. 아내의 보좌를 받아온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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