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구나무 선 나나, 뚱보 흑인여성 '미의 화신' 묘사
억압서 해방 예술로 당당하게 삶의 환희 그려

나는 왜 니키를 따라가는가.   창 밖의 나무들이 밤새 온통 하얀 눈꽃을 피운 아침. 과천 현대 미술관으로 향하는 나는 들떠 있었다. 마치 오랜 친구를 오랜 세월 만에 만나는 심정과 같이… 니키 드 생팔(1930~2002)의 삶과 작품에 관해 알게된 것은 1997년이었다. 그리고 2002년 무덥던 여름, 그녀의 작품을 만나기 위해서 끓는 태양 아래 달구어진 콩나물 자동차에 아이들을 주렁주렁 싣고서 니스까지 내달았었다. 죽음 직전 그녀가 니스 근·현대미술관에 기증한 작품들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2006년 여름엔 프랑스와 이탈리아 국경을 48시간 만에 넘는 대장정 끝에 토스카나에 있는 그녀의 ‘타로 공원’에 찾아갔다.  오래 간직한 소중한 꿈이었으므로.

니키에게 가는 여정

전시장에 들어서서 위로 치켜뜬 도도한 시선의 그녀를 만나는 순간 숨이 꽉 막힌다. ‘보그’와 ‘라이프’지 표지모델을 할 정도의 빼어난 미모를 가졌지만 그보다 아름다운 것은 자신의 아픈 삶과 겨루어 승리한 그녀의 용기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고 그것이 아버지와 나 사이를 영원히 갈라 놓았다. 사랑이었던 모든 것이 증오로 변했다. 나는 살해되었다고 느꼈다.”

열한살, 친부의 강간 이후 니키의 삶은 분노와 신경증으로 얼룩졌고 이는 결혼 이후까지 계속되었다. 니스의 한 병원에서 자신을 구하기 위해 그림 수업에 매달렸고 마침내 그림이 그녀를 변화시켰다(그녀의 터닝 지점이 되어준 도시 니스에 막대한 작품 기증으로 보답했다).

화가가 되기 위해 니키는 세 아이를 두고 집을 떠났고 평생 동료이자 반려자가 될 키네틱 아트 조각가 장 트웽글리를 만났다. 이는 그녀가 바로 미술계의 중심으로 이동하는 직선코스가 됐다.

초기 작업인 ‘아상블라주’ 연작에는 그녀가 지나온 상처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도려낼 수 없을 것 같은 칼, 부러진 쇠꼬챙이, 녹슨 못과 가위, 깨진 파편 등 ‘자르고 깎고 구멍내고 다치게 하는 재료’들이 화면 가득하다. 그녀의 작업은 자신의 삶을 그대로 정직하게 관통하는 것들이었다.

이후 ‘아상블라주’ 아래에 물감주머니를 묻고 석고로 덮은 뒤 총을 쏘아서 화면 위로 물감이 튀어 흐르게 하는 이른바 ‘사격회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폭력성에 대한 폭력적 제의

사격 퍼포먼스

그녀는 그림이 피 흘리고 죽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그림 위에 총질을 하는 것은 ‘희생자 없는 살인행위’였다. 때로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을 때 그녀는 응수했다. 자신을 자라게 만들고 열매를 맺게 만든 것은 다름아닌 ‘광기’였다고.

“난 나 자신과 시대의 폭력성을 향해 총을 쏘았다. 나 자신의 폭력성을 쏘아버리자 더 이상 그것을 짐짝처럼 지고 다닐 필요가 없어졌다.”

파괴의 의례는 그녀를 분노와 폭력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피 흘리는 ‘밀로의 비너스’는 머스 커밍햄, 라우젠버그, 프랭크 스텔라 등 친구들과 함께 공연한 연극에서 사용된 거대한 조각이다. 공연 도중 비너스에 총을 쏘아 미의식을 둘러싼 세상의 고정관념을 조롱하고 일격을 가한다.

‘물구나무 선 검은 나나’ (Nana Noire Upside Down), 1965~66.
▲ ‘물구나무 선 검은 나나’ (Nana Noire Upside Down), 1965~66.
물구나무선 나나,

삶의 환희

거칠고 본질적인 자기 응시의 시기를 넘어 니키는 비로소 안정을 찾아간다. 피 흘리던 괴물은 풍만하고 즐거운 ‘나나’ 연작으로 변화했다.

화려한 색채로 장식한 ‘물구나무 선 나나’는 뚱뚱한 흑인 여성을 미의 화신으로 묘사했다. 억압에서 해방된 나나들이 당당하게 삶의 환희를 노래하고 춤춘다. 스톡홀름의 한 미술관에서는 길이 28m, 높이 9m의 누워 있는 ‘Horn 그녀’를 만들어서 관객들이 ‘그녀’의 질을 통해 내부로 들어가 거대한 모성과 영원한 여성성을 경배하도록 했다.

작품들은 친근하고 따뜻해졌으며 점차 공공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파리의 관광객들을 시원하게 쉬게 하는 퐁피두 미술관 옆의 움직이는 ‘스트라빈스키 분수’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20여년의 대역사 끝에 완성한 ‘타로공원’은 그 압권이라 해야 할 것이다. 바르셀로나를 방문한 니키는 가우디의 아름다운 구엘 공원을 보았고 그곳에서 스승과 운명 둘 다를 만났다. 그로부터 24년 후, 마침내 ‘타로공원’이라는 큰 모험을 출범했다. 공원 내부에 ‘황녀’라는 조각 건축물을 짓고 그 안에 살면서 멈출 줄 모르는 마녀처럼 이 방대한 사업을 계속했다. 이 작업을 통해서 그녀는 두고 온 세 아이들과 함께 세상의 모든 아이들을 품는다.

왜 하필 카드게임을 주제로 한 타로공원이냐는 질문에 그녀는 그 안에 삶이 있기 때문이라 말한다.

“삶이 카드게임이라면 우리는 그 룰을 모른 채 태어났다. 하지만 게임은 지속되어야 한다. 타로카드는 단순히 게임이지만 그 이면에는 철학이 존재한다. 타로는 영적 세계와 삶의 시련에 대한 위대한 이해를 주었다. 그리고 모든 어려움은 극복될 것이며 결국 내적 평화와 천국의 정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미술이라는 행위를 통해 고통을 환희의 꽃무더기로 바꾸어 세상과 나누었던 니키 드 생팔. 내가 아직도 그녀에게로 향해 가는 이유다.

‘니키 드 생팔’展 1월 21일까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본관 제2전시실.

문의 (02)2188-6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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