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 피해여성, 남편에게 위치추적 당해 자살 ‘충격’

경북 ○시의 40대 여성이 폭력 남편에게서 26년 만에 탈출을 감행했다가 결국 자살한 사건이 알려지면서 파문이 일고 있다. 이는 지난해 7월부터 시행 중인 ‘위치정보 이용보호법’에 따라 관할 소방서가 가해 남편이 피해 여성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 비극의 단초가 됐다. 이에 따라 지역 여성단체들은 사회안전망의 강화를, 중앙 여성단체들은 10월 29일부터 시행 중인 가정폭력방지법 개정안에 미처 반영되지 못한 처벌조항 강화를 촉구하고 나섰다.

지난 9월 초 R씨는 대학생인 큰딸과 함께 지역 상담소를 찾아와 철도공무원인 남편의 수십 년에 걸친 폭력과 폭언으로 인한 이혼소송과 가족 안전문제, 십대인 아들의 전학문제 등을 의논했다. 가해 남편은 아들 학교로 찾아가 R씨가 제출한 상담확인서를 확인하고 상담소로 찾아가 행패를 부리며 상담원을 협박하는 한편, 아내가 자녀들과 함께 가출했다고 경찰에 신고하고 “가족 4명이 동시에 가출, 동반자살할지도 모른다”는 명목으로 관할 소방서가 위치추적을 하게 했다. 결국 남편에게 가족이 붙잡혀 오는 상황이 벌어졌고, 두 딸은 아버지의 의사에 반해 엄마의 이혼을 부추겨 “아버지의 얼굴에 먹칠을 했다”며 집에서 쫓겨나 서울로 피신했다.

어린 아들과 함께 남편에 의해 감금당했던 R씨는 결국 학교 뒷산에서 음독한 상태로 발견돼 병원으로 후송됐으나 끝내 숨을 거두었다. R씨의 장례식장에서 가해 남편은 ‘가증스럽게’ 내내 울었다.

이렇게 R씨의 보름간의 탈출 시도는 허망하게 끝났다. 가해 남편은 이 기간 내내 가족과 상담소에 “R이 있는 곳을 다 알고 있다”고 윽박질러 왔고, R씨의 자살 동기 역시 번번이 위치를 남편에게 추적당하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겠구나”란 절망감에서 비롯됐다고 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이 기간 내내 상담을 맡았던 L씨는 “정황상 피해 여성이 절대적으로 신변 안전을 보장받아야 하는데 학교, 소방서 같은 공공기관에서 이 원칙이 허망하게 무너지니 상담할 힘조차 안 난다”고 토로한다. 상담소에서 가해자가 직접 찾아오더라도 R씨에 대한 모든 상황은 절대 비밀에 부쳐달라고 신신당부했지만, 학교 관계자의 부주의함으로 상담소가 노출됐고, 가해자 자신은 툭하면 “119에 있는 친구로부터 딸의 휴대전화 위치와 통화내역을 조회해 K시에 (가족이) 있는 것을 다 알고 있으니 가서 잡아오겠다”고 큰소리 쳤다는 것. 이에 L씨가 R씨에게 이를 알려 이후 이들 가족은 공중전화로 연락을 해왔지만, 결국 그 공중전화 위치까지 추적당해 남편에게 붙들려 감금당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L씨는 “가해자가 R씨의 옷과 집안에 석유를 뿌려놓고 가족에게 ‘폭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가출했다’는 진술서를 쓰라고 수시간에 걸쳐 집요하게 협박했고, 이에 R씨도 ‘나만 없으면 된다. 못 산다. 죽고 싶다’고 죽기 전 두 딸에게 말했다”고 전했다.

L씨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남은 두 딸과 아들의 안전문제. 현재 두 딸은 휴학한 채로, 아들은 전학해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들은 상담소는 물론 담당 변호사가 “너무 가슴이 아파 (이혼소송) 수임료를 되돌려주고 싶다”며 수차례 연락했는데도 불구하고 연락이 두절된 상태다.

아버지에게 대항해 구타당하고 스트레스성 질병까지 생긴 작은딸에 대한 염려가 특히 크다. 작은 딸은 R씨의 죽음 직후 “(아버지를) 법적으로 처벌하고 싶다”고 했지만, L씨는 “폭력가정의 자녀들의 경우 무기력증 때문에 많이들 자포자기한다”고 추측한다. 아이들이 폭력 아버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버지를 ‘아동폭력’으로 고소하는 것이지만, 현재로선 그런 의지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사건 발생 직후 상담소 측은 아들의 학교에 가정폭력 피해 가정의 비밀 유지를 재당부하는 공문을 보내는 한편, 상담소장이 소방서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사건 경위를 알리며 위치추적에 대해 주의를 요청했다. 그러나 소방서장은 “가족이 오면 어쩔 수 없다”는 답변만 되풀이했다고 한다.

도지사를 회장으로 여성긴급전화 1366, 소방본부, 경찰청, 교육청 관계자 등 17명으로 구성된 ‘경북여성폭력방지협의체’ 관계자는 “이와 유사한 사건으로 몇 사람이나 희생되고 나서야 이 같은 문제가 공론화될까 막막한 심정”이라며 “지역 정서상 ‘여자가 가출을 했다’는 것이 정죄당하고, 원칙보다는 우선 친분부터 앞서는 것이 큰 문제”라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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