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말하는 인생의 3대 실패가 있다. 첫째는 청년출세(靑年出世), 둘째는 중년상처(中年喪妻), 셋째는 노년무전(老年無錢)이다. 노년을 고상하게 보내고 싶어도 경제적 뒷받침이 안 되면 힘든 까닭이다. 그렇다면 물질적 여유로움이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꼭 그렇지는 않다. 경제적 여유가 인생의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필요조건은 될 수 있어도, 충분조건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약성서의 사대복음서에 공통으로 나오는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 즉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식사 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 바로 행복이 물질적인 것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음을 보여주는 예가 된다.  

자신의 행복을 어떻게 파악해 볼 수 있을까?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필자의 경우 산수 시간에 ‘분수’를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간단히 파악할 수 있는 ‘행복지수’라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각자 살면서 ‘바라는 것’과 ‘성취한 것’들이 있을 것이다.

행복지수는 바로 이 ‘바라는 것’을 분모에 놓고, ‘성취한 것’을 분자로 삼을 때 나오게 된다. 예를 들어 바라는 것이 100, 성취한 것이 80이라면 행복지수는 80이 된다. 이 행복지수를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수준인 100으로 만들고 싶다면?  두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즉, 분자의 ‘성취한 것’을 키우거나, 또는 분모 쪽의 ‘바라는 것’을 줄이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의 증진을 위해 ‘성취’를 키우는 일에 더 큰 관심을 둔다. 하지만 분모를 낮추는 일, 즉 ‘바라는 것’을 관리하는 것 또한 주어진 여건 속에 자신의 행복을 키울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성취하는 것과 바라는 것 잘 관리를

행복지수의 특별한 경우를 생각해 보자. 즉, ‘바라는 것’보다 ‘성취한 것’이 더 많다면 행복지수는 어떻게 될까? 다시 말해 본인은 100을 바랐는데 뜻밖에(?) 120이란 결과를 얻게 되었다면 이 경우 행복지수는 얼마가 될 것인가? 산수에 밝은 분들은 금방 120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120이라는 행복지수는 의미가 없다. 왜일까? 행복지수 100이 이미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는 것을 뜻하므로, 그보다 큰 지수는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우리는 이 여분의 행복지수를 숫자가 아닌, 말로써 ‘감사’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 20이 어떻게 얻어진 것이든 얻어진 자체도 ‘감사’이겠지만, 정작 이를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의 감사’ 없이는 여분의 행복이란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된 행복은 의외로 가까이 있어 보인다. 행복지수의 ‘성취한 것’과 ‘바라는 것’을 잘 관리할 수 있고, 여기에 ‘감사의 마음’을 더할 수만 있다면, 이게 곧 참 행복을 불러오지 않을까?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컵에 물이 반 들어 있을 때 ‘반이나(!)’ 남았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반밖에(?)’ 남지 않았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당연히 ‘반이나’ 남았다고 보는 사람의 행복지수가 더 높을 것이다. 동일한 조건이라면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이 ‘성취한 것’에 대한 ‘마음의 감사’가 보이지 않게 행복지수의 분자를 크게 만들기 때문이다.

마음의 감사에서 우러나오는 ‘반이나(!)’와 같은 관점이 왜 인생의 행복을 좌우하게 되는지를 말해준다. 얼마 전 아프리카의 에리트레아(Eritrea)라는 나라의 경제개발장관과 면담을 하게 되었다. 장관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자기 나라도 한국처럼 경제발전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믿기 어렵겠지만, 과거 우리나라는 아프리카 대부분의 나라들보다도 못사는 그야말로 빈곤한 나라였다. 50년대 중반 미국 의회는 한국을 희망 없는 나라로 보고,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원조만 해줄 것을 결의했다. 천연자원조차 부족한 우리로서는 스스로 살 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상황이 오히려 경제 발전의 촉매제가 되었다. 지금은 어떤가? 2005년 기준 한국의 경제규모는 세계 공동 10위다. 국가의 경제발전 행태와 그에 따른 성취를 행복의 관점에서 볼 때, 결국 국가차원에서도 개인과 마찬가지로 한 국가가 마음을 어떻게 먹는가에 따라 부강(행복)해질 수도 있고, 빈곤(불행)해질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공한 삶은 내 주위가 행복해지는 것

100을 바랐는데 120을 가진 분은 그 20을 타인에게 나누어 줘도 여전히 행복지수는 100으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분이다. 감사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20을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다면, 사회 전체적으로는 ‘행복’과 ‘감사’가 함께 배가 될 수 있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이제 참 행복에 관한 소고 끝에, 필자가 생각하는 ‘성공한 삶’에 대한 정의를 덧붙여 보고자 한다. ‘성공한 삶’이란, 내가 그 자리에 있음으로 해서 그 자리가 좀 더 빛나고, 또 나로 인해 내 주위가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다면, 일의 성격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성공한 삶일 것이다.

서울 시청역 앞의 한 구역을 맡은 환경미화원의 예이다. 그 분은 자기가 맡은 구역을 누구 못지않게 깨끗이 청소한다. 그 덕에 매일 아침 그 앞을 지나 출근하는 모든 분들이 행복하게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그 분의 성공한 삶이 아니겠는가?

여성신문의 모든 독자 여러분들이 지금 이 순간 어디에 계시든 그 자리가 자신으로 인해 더욱 빛나고, 주위분들이 더 행복해지는 그런 의미의 성공한 삶을 사시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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