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적 아버지’들은 인정 당연시해…

국내 최대 규모의 시 문학상인 2006 미당문학상(상금 3000만원) 수상자로 우리나라 대표적 여성주의 시인인 김혜순(51)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가 결정됐다. 김혜순 시인의 수상 의의를 분석한 김승희 시인(서강대 국문학과 교수)의 글을 싣는다.

먼저 김혜순 시인의 ‘미당문학상’ 수상을 축하한다. 어떤 사람은 “여성 시인이 큰 상을 받았으니 여성시에 대한 문단의 인정이 시작된 것 같아 기쁘다”며 ‘최초의 여성 수상자’에 의미 부여를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가장 김혜순답지 않은 시로 수상을 하였으니 김혜순의 수상이 여성시에 대한 인정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여성신문이 나에게 청탁했을 때의 의도는 아마도 첫째 입장, ‘미당문학상 여성 최초의 수상자, 김혜순의 수상은 여성시에 대한 문단의 인정이다’라는 시각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른 신문들은 나에게 그런 청탁을 하지 않는데 왜 ‘여성신문’이 여성인 나에게 그런 청탁을 했겠는가. 바로 이 ‘청탁’ 자체가 한국 시단의 이상한 가부장주의적 전통과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체념의식(승화된 고고함?), 여성 자신들의 문화적 열패의식을 읽을 수 있다.

여성들 스스로가 “여성주의적 시를 많이 써온 김혜순 같은 여성 시인이 이런 큰 상을 받다니!”라는 겸손함과 놀라움, 자매애로서의 흐뭇함 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 한 우리 문화의 기형적 남성 중심주의, 권력주의는 계속 퍼져갈 것이다.

9년 전쯤 버클리 대학의 강연에서 들었던 아드리안 리치의 말이 생각난다. 문단 초기 시절 그녀도 스승이라고 할 만한 남성 시인들, 다시 말하면 ‘문학적 아버지’라고 불릴 수 있는 그런 시인들의 시각을 의식하며 시를 썼다고 했다. 그녀가 얼마나 ‘문학적 아버지’들의 규범을 의식하고 시를 썼는지 그녀의 초기 시는 모두 형식주의적 시였다.

머지않아 그녀는 그러한 형식에의 몰두가 여성으로서의 자기의 목소리를 억압하고 있으며 고전적 전범이 된 형식이란 것이 남성 미학이며 자기의 여성 내러티브와 피와 살의 욕망을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하여 고전적 서정시의 형식을 떠나 자신의 목소리를 담아낼 자유로운 형식을 창조하게 되었다고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런 문학적 아버지들의 미적 규범을 떠났을 때 그녀는 비로소 고유성과 독창성을 가진 ‘미국 현대시사의 아드리안 리치’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김혜순 시인은 이미 78년 등단한 이후부터 ‘또 다른 별에서’ ‘나의 우파니샤드’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등 실험적이고 매력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이며 아름다운 그런 시들로 한국시사의 전위에 서있었다.

그녀의 매력은 실험의 극치와 서정의 극치가 맞닿는 데 있으며 시 한 편마다 절정을 위한 수고를 하는 데에 있다. 여성주의적인 것이 주제나 소재 같은 저차원의 것이 아니라 목소리와 리듬 그 자체에 이미 생체화되어 있다는 데에 있다.

그녀의 넋이 여성의 비애에 닿아있을 때 그녀의 상상력은 초현실주의의 미친 리듬을 타고, 그 비애가 승화되어 있을 때 담담한 서정시의 형식을 낳는다. 소월문학상을 받았던 ‘잘 익은 사과’나 이번 미당문학상을 받은 ‘모래 여자’는 둘 다 후자에 속한다. 결국 문학적 아버지들은 인정할 수 있는 것을 인정했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받아들인 것뿐이다.

더 많은 여성 시인들이 아무 상이라도 다 받을 수 있고 그래도 ‘여성신문’에서 여성 시인에게 청탁을 하지 않을 때 그 때야 비로소 우리 시단의 기형적 남성권력 중심주의가 교정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어쨌거나 김혜순 시인, 축하합니다. 여성 시인으로서의 자매애의 흐뭇함으로서가 아니라 당신의 극치의 문학에 대한 아름다운 경의로서.

김혜순 시인은 한국 시단의 최고 권위의 상으로 손꼽히는 ‘2006 미당문학상’을 수상한 김혜순 시인은 79년 계간  ‘문학과지성’에 시로 등단했다. 시대를 앞선 시어로 한국의 여성시를 대표하는 그는 90년대 ‘또 하나의 문화’ 동인으로 활동하며 여성학자들과 깊은 교류를 맺기도 했다. 97년 여성 시인 최초로 김수영문학상을, 2000년 현대시작품상을 수상했고 현재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시집으로 ‘또 다른 별에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어느 별의 지옥’ ‘우리들의 음화’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한잔의 붉은 거울’ 등이 있다.

미라의 발굴을 소재로 한 수상작 ‘모래여자’에 대해 이남호 문학평론가는 심사평에서 “김혜순 시인의 깊고 조용한 응시가 어디까지 뻗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면서 우리 시대 여성성의 한 기호가 될 수 있는 작품”이라고 밝혔다.

[수상작] 모래여자

모래 속에서 여자를 들어올렸다

여자는 머리털 하나 상한 데가 없이 깨끗했다

여자는 그가 떠난 후 자지도 먹지도 않았다고 전해졌다

여자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숨을 쉬지도 않았지만

죽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와서 여자를 데려갔다

옷을 벗기고 소금물에 담그고 가랑이를 벌리고

머리털을 자르고 가슴을 열었다고 했다

여자의 그가 전장에서 죽고

나라마저 멀리멀리 떠나버렸다고 했건만

여자는 목숨을 삼킨 채

세상에다 제 숨을 풀어놓진 않았다

몸속으로 칼날이 들락거려도 감은 눈 뜨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자를 다시 꿰매 유리관 속에 뉘었다

기다리는 그는 오지 않고 사방에서 손가락들이 몰려왔다

모래 속에 숨은 여자를 끌어올려

종이 위에 부려놓은 두 손을 날마다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낙타를 타고 이곳을 떠나 멀리 도망가고 싶었다

꿈마다 여자가 따라와서

검은 눈 번쩍 떴다

여자의 눈꺼풀 속이 사막의 밤하늘보다 깊고 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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