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업인을 만나다 (1) ‘수제치즈 만들기’ 집념 조옥향 은아목장 대표
그림을 그리던 스물아홉 서울 주부가 목장을 일구겠다며 남편까지 설득해 경기 여주 땅으로 귀농한 지 26년째. 한국 낙농업계의 대표적인 여성 경영자 조옥향(53) 은아목장 대표가 9월 ‘수제 치즈’를 선보일 준비에 여념이 없다.
지난 83년 3마리에서 시작해 현재 165마리 젖소에서 연간 9000~1만㎏의 우유를 생산하고, 종축 개량을 통해 국내 최고의 젖소 보유 기록을 가진 중견 목장으로 성장한 은아목장은 지난 8월 내내 ‘치즈공방’과 ‘정원 가꾸기’ 공사를 벌였다.
“국내산 원유의 98%가 1등급 우유라는 것을 아는 소비자가 얼마 없는 것처럼, 고품질 우유를 맛으로 가려낼 수 있는 소비자는 거의 없다”는 조 대표는 “체험목장을 열면 적어도 방문하는 소비자들에게 좋은 품질의 우유와 치즈를 맛보게 할 수 있다”며 환한 미소를 짓는다.
조 대표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타결되면 본격적으로 외국의 우유 및 유가공 제품이 수입되겠지만, 이들 제품은 신선도가 생명인 만큼 기술만 있다면 충분히 고급시장을 선점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기 위해 생산자와 소비자가 대화를 나눠야 한다. 그의 체험목장은 바로 대화의 공간이 될 것이다.
조 대표의 치즈 만들기는 10년 전부터 시작됐다. 지난 96년 우량 젖소 품평대회인 ‘한국홀스타인 품평회’에서 챔피언을 획득하고, 부상으로 가게 된 일본 연수. 그곳에서 조 대표는 일본 목장주로부터 “부부 둘이 1톤의 우유를 생산했을 때 4식구가 먹고 살았는데, 그 1톤으로 치즈를 만들었더니 50명이 먹고 살 수 있더라”는 말을 들었다.
단순히 우유 생산에만 주력하던 우리의 낙농업 현실에 하나의 지침과도 같은 말이었다. 그때부터 ‘수제 치즈’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아이들 뒷바라지에 목장 일이 산더미인 상황에서 유학은 꿈도 꿀 수 없는 터라 일본, 독일, 프랑스 등 수제 치즈 관련 단기 강좌를 찾아다니며 배웠다. 그 시간들을 다 합하면 꼬박 2년 동안 유학을 한 셈이다.
“유럽 연수에서 배운 것은 중·소 낙농가들도 노하우 하나로 고소득을 올릴 수 있다는 거였어요. 제조자마다 조금씩 다른 손맛이 부가가치가 되죠. 전라도 김치, 경기도 김치 맛이 다르고, 그 차이가 상품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9월부터 ‘축산물가공처리법’의 개별 목장 유가공 제품 생산 및 판매에 관한 조항이 완화됨에 따라 본격적인 솜씨를 뽐내볼 생각이다. 얼마 전 직접 만든 치즈를 들고 이탈리아 전문 식당을 찾았다. 이탈리아에서 수입해 온 치즈와 국산 치즈로 조리한 후 맛 평가를 부탁하기 위해서다. 결과는 조 대표의 치즈가 우승이었다. 이 자신감을 바탕으로 그는 앞으로 치즈, 버터, 요구르트, 아이스크림 등 은아목장의 브랜드를 하나 둘 선보일 계획이다.
조 대표의 둘째 딸은 요즘 일본 ‘낙농학원대학’에서 ‘치즈 공부’ 중이다. “엄마처럼 살고 싶다”고 일찌감치 농업고등학교로 진출한 딸은 “엄마표 수제치즈를 들고 세계로 진출하겠다”는 야무진 목표도 세워놓은 상태다. 그런 딸이 한없이 자랑스럽다는 조 대표는 “남편과 함께 텐트 생활을 하며 맨손으로 일군 목장을 딸이 이어가겠다고 해서가 아니라 어린 딸이 농업의 비전을 일찌감치 알아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국 농업의 희망은 여성과 가공산업(부가가치형 상품 개발)에 있다”고 단언하는 조 대표는 “여성 농업 인재를 키워내기 위한 교육정책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조 대표는 요즘 두 달에 한 번씩 중국 지린(吉林) 성에서 ‘낙농기술’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그가 고문으로 참여하고 있는 한 축산사료 회사가 주최한 교육행사인데 현지의 반응이 대단하다. 중국 정부에서도 목장을 마련해 줄 테니 직접 경영하며 기술을 전수해 달라고 권하고 있다. 새로 치즈 사업을 계획하고 있어 선뜻 제안을 받아들이지는 않고 있지만 중국과 동남아시아 등 낙농 후진국에 한국의 낙농기술을 전수하는 것도 결국 우리 농가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신중히 고려 중이다.
“한·중·일 세 나라 모두 농업인, 특히 여성 농업인은 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어요. 하지만 여성이 농업의 ‘희망’이라는 점도 공통점이지요. 여성들은 원래 서로 돕고 배려하는 특성이 있잖아요. 국제 교류를 통해 더 발전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드는데 한번 도전해 볼까요?”
조 대표가 여성 농업인의 저력을 어디까지 보여줄지 자못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