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의 발견(상)-역사의 보고

터키는 생각보다 한국에 가까이 있었다. 이스탄불로 오가는 비행기 안에 가득 찬 한국인들은 마치 강원도로 떠나는 동창회나 동네 모임 회원들 같았다. 외국행이라는 생소함과 설렘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터키 길이었다. 8박9일의 여정에도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어김없이 들리는 한국말 소리는 터키 방문 한국인이 2005년에는 9만2000여 명이었는데 올해는 벌써 12만 명이 넘었다는 통계 숫자를 실감케 했다.

투르크족의 조상인 돌궐족이 고조선, 고구려, 발해시대의 부족동맹의 일원으로 지낸 역사 속의 긴밀한 유대도 그러려니와, 6·25 당시 1만5000명이라는 원병을 보내서 721명이나 전사했고, 200명이 부상하며 한국을 무작정 도와준 기억으로 터키는 더욱 가까운 친지 국가로 다가왔다.

오른손 바닥을 활짝 핀 모양을 한 터키는 북쪽해안, 흑해와 남쪽 해안, 에게해와 지중해 사이에 기다란 동서로 뻗친 반도다. 손가락 끝은 마르마르해와 에게해를 접하여 유럽 쪽으로 뻗어있고, 남쪽으로는 지중해 연안의 안탈라야, 보드룸 등의 해안도시가 갖은 역사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손바닥 부분은 시리아와 이라크의 북쪽 지역으로 손바닥 안쪽에는 내륙지역에 노아의 방주로 유명한 해발 5165m의 아으르(아라랏)산, 거대한 석상으로 알려진 콤마게네 왕국의 신전이 있는 넴루트산,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원천지인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의 최상류와 예루살렘의 교회 핍박을 피하여 초대교회를 이루었던 지중해 연안의 안타키아(안디옥)가 위치해 있다. 필자의 터키 여정은 손바닥 지역에 대한 호기심은 접고, 역사의 질곡이 더욱 즐비한 손가락 지역을 돌아보는 여행이었다.

이스탄불, 아시아-유럽 교차지역 역사 흔적

보스포루스해협을 사이에 두고 아시아와 유럽 지역으로 나뉜 터키 최대 도시 이스탄불의 거리에서 오랫동안 터키가 동·서양의 교차지역이라는 고등학교 시절 역사시간의 배움이 바로 눈앞에 전개되는 감동이 전해졌다. 이스탄불은 기원전 3000년부터 사람들이 살았고 기원전 7세기에는 그리스가 식민화하여 ‘비잔티움’이라 명명했다. 기원전 100년 전부터 로마제국의 일부가 되더니, 330년에는 전 로마제국의 수도로서 콘스탄티누스 1세가 비잔티움을 ‘콘스탄티노플’이라고 개명했다. 콘스탄티노플은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고, 비잔티움이라고도 불리는 동로마제국의 수도로 페르시안, 아랍, 유목민, 제4차 십자군전쟁과 지진, 화재 등 재해에 휘말렸지만 로마의 정체성을 1100년이 넘게 유지하여 오스만투르크의 침공을 받아 함락된 1453년까지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이름을 간직할 수 있었다.

‘이스탄불’로 이름이 바뀐 이 동·서양 교차지역은 당시 인구 50만 명의 문화, 정치, 교역의 중심지였다. 제1차 세계대전까지 오스만제국의 수도였는데, 1923년 독립전쟁 후 건립된 터키공화국의 대통령 케말이 수도를 내륙지방인 앙카라로 옮겼다. 그러나 두 대륙 사이에 위치한 이스탄불의 위세는 거침없이 팽창하여 현재 인구 1300만 명에 매년 77만 명의 이민이 들어오는 거대 도시로 성장해 가면서 터키 땅의 긴 역사 속에  기록될 오늘을 차곡차곡 엮어가고 있다.

이스탄불의 역사만 살펴보아도 터키에서 수많은 역사가 만들어졌고, 또 지나갔음을 알 수 있다.

성소피아 성당, 벽 뒤 성화 다 볼 수 없어 아쉬워

이러한 거대한 역사의 현장인 이스탄불에는 수없이 많은 역사물이 앉아 있다. 가장 대치되는 두 역사물이 성 소피아 성당과 술탄아흐메트 사원(블루 모스크)이다. 현재의 성 소피아 성당은 537년에 기독교 성당으로 지어졌다. 밀라노칙령으로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교회 짓는 건축과 음악, 미술의 역사가 발달했다. 성 소피아 성당도 그러한 흐름을 타고 지어졌다. 높이 56m, 바닥 지름이 72m, 천장의 둥그런 돔의 직경이 36m나 되고 아치형식과 모자이크 성화로 가득 찬 거대한 성전이다.

1453년 로마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제국은 성 소피아 성당을 이슬람 사원으로 바꾸어버렸다. 첨탑 4개를 세웠고, 진노란 색으로 덧칠하여 비잔틴 양식의 아름다운 기독교 모자이크는 사라졌고, 메카로 향한 제단이 삽입되었다. 이슬람식 교리를 금 글씨로 쓴 큰 원판 7개가 벽면에 걸려 있는 이슬람 사원의 모습이다. 터키공화국이 시작되고 1937년 이 사원의 벽면 발굴 작업을 하는 과정에 덧칠한 벽을 긁어내니 비잔틴 모자이크로 장식된 원래의 벽면이 나왔다. 그러나 케말 대통령은 천장, 벽 벗기기를 중단시켰다. 이는 정치적, 종교적 결단이었으리라. 터키 인구의 90%가 이슬람교도인 것을 감안하면 이 결정이 합리적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아름다운 성화로 가득 차 있을 비잔틴 예술을 그리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직도 애태우게 한다.

블루 모스크, 금과 바꾼 첨탑 6개의 웅장함

성소피아 성당 맞은편에 자리한 블루 모스크라고 불리는 술탄아흐메트 사원은 오스만제국 황제가 1616년에 지은 사원이다. 6세기에 지은 비잔틴 제국의 성 소피아 성당을 능가하는 사원을 지으려는 황제의 욕심을 실현시킨 건축물이다. 중앙의 돔을 네 개의 작은 돔들이 받치고 있는 형태다. 사원 내부에 2만여 개의 파란색 이즈닉 타일로 장식하여 그 이름이 블루 모스크라고도 한다. 이 사원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첨탑이 여섯 개라는 사실이다. 국가 사원은 네 개의 첨탑을 올리는데 블루 모스크는 두 개의 첨탑이 더 있다. 아흐메트 황제가 이 새 성전을 성 소피아보다 크고 높게 짓고 금으로 장식하라고 명령하였으나 건축가 미마르 신할은 당시 어려운 재정을 감안하여 예산을 줄이기 위해 꾀를 부렸다 한다. 여행길에서 돌아와 분노하는 황제에게 금을 뜻하는 ‘알튼’과 여섯을 뜻하는 ‘알트’를 잘못 알아듣고 금을 쓰는 대신 첨탑 6개를 세웠노라고 우겼다고 한다. 이렇게 블루 모스크는 안정된 돔의 균형과 가지런한 여섯개의 첨탑이 명물이다.

이 사원들 바로 옆에 로마 제국의 통치방법인 마차경기장, 뱀기둥, 오벨리스크, 콜로소스 등이 자리한 히포드룸, 알렉산더의 관이 있는 고고학박물관, 물을 관리하던 지하 저수지 등이 가까이 있어서 걸어 다니며 볼 수 있었다. 오스만제국 말기인 1843년에 세워진 너무나 아름답고 진귀한 물건들이 가득한 돌마바흐체 궁전, 보스포루스 해안에 위치하고 있다. 특히 돌마바흐체 궁전은 총 14톤의 금과 40톤의 은이 들어간 궁전이었다. 보스포루스의 양안에 위치한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배 위에서 만끽하면서 3000년의 이스탄불 역사에 나를 끼워 넣어 보았다.

“친절하고 사랑스럽다”는 뜻의 카파도키아

이스탄불에서 날아간 앙카라는 구릉지대에 위치한 조그만 촌락이었으나 케말 대통령이 1923년에 공화국을 수립하면서 천도한 곳이다. 온갖 바다에 노출되어 침략의 역사 속에 위치한 이스탄불에서 내륙 깊숙이 들어앉은 앙카라를 택한 케말 대통령은 방어력을 강화하는 이유 외에도 아마도 동서양의 교차 역사 속의 일부인 터키가 결국 아시아적 속성을 강조한 역사적 결단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난 터키가 저리도 유럽연합(EU)에 들어가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면 필자의 생각이 전혀 맞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면서 비행기에서 내렸다.

앙카라에서 한국전쟁 참전비만을 방문하고 곧바로 떠난 길은 4시간 만에 친절하고 사랑스럽다는 뜻을 가진 카파도키아에 다다랐다. 기암동굴이 가득한 이 지역은 기원 전 250년쯤에 화산이 폭발하여 쌓인 화산재가 풍화작용으로 빚어놓은 기기묘묘한 형상의 버섯바위들이 믿기 어렵게 언덕 위에 퍼져 있다. 390년에 만들어진 괴레메 수도원은 단단한 흙이 굳어진 산골짜기에 작은 동굴들을 파서 수도사들의 삶의 터를 만들어 놓은 곳이다. 수도사들이 암굴 속에 미니 교회를 만들어 천장과 벽에 그린 예수, 마리아, 제자들의 성화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긴 당시의 수도사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게 했다. 부엌, 식당, 창고들은 절제된 삶의 전형으로 선반, 저장고 등 정돈된 시설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속에 320개의 교회, 기숙사 운영본부도 있다. 한 골짜기 낮은 벽면에 뚫은 조그만 구멍인 비둘기 집도 있어서 식용으로 고기를 먹고 똥은 밭 거름과 프레스코 벽화의 염료로 사용한 다용도 비둘기를 사육했다.

기독교가 박해 받던 시절은 서기 36년에서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밀라노칙령이 발효된 313년까지다. 이 시절 로마군의 박해에서 살아남기 위한 지하 동굴의 삶의 현장이 4만 명의 공동생활 터인 파샤시 계곡에 있었다. 지하 8층 깊이로 끝없이 내려가는 동굴 속에 만들어진 숙소들, 식당, 학교, 도서관, 결혼 터 등과 물과 통풍시설 등 일상생활을 가능케 하기 위한 기독인들의 노력이 눈물겨웠다. 빗물을 받아 이용하고, 용변과 시체는 밖으로 내보낼 수 있는 시설도 있었다. 로마군이 지하로 쳐들어 오면 그들의 침입로를 차단하기 위해 벽 속에 숨겨진 250여 개의 돌문 차단기가 있었다. 용맹스러운 로마군일지라도 이 동굴에 감히 올 용기가 나지 않을 정도로 꼬부랑꼬부랑 내려가고 또 내려가는 길이었다. 우리 일행 중 한 사람은 좁은 공간에 대한 공포증으로 괴로움을 호소했다. 종교가 만들어 내는 인간의 힘을 절감하면서 2000년 전 땅속 동굴에서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새롭게 등장한 종교를 믿으며 살아갔을 사람들의 애로에 가슴이 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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