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필하모닉에서 근무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음악가들과 함께 일할 기회가 있었다. 로린 마젤, 쿠르트 마주어, 리카르도 무티, 세이지 오자와 등 지휘자, 피아니스트인 아르헤리치, 엠마뉴엘 엑스, 랑랑 등과 첼리스트인 로스트로포비치, 요요마, 이자크 펄만, 장영주, 막심 벤게로프, 조슈아 벨. 길 샤함 등 바이올리니스트도 있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려 한다.

얼마 전 제일 좋아하는 연주자인 피아니스트 아르헤리치의 공연을 담당하게 됐다. 다이내믹함과 섬세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아르헤리치는 16세 때인 1957년에 3주 간격으로 열린 부조니 콩쿠르와 제네바 콩쿠르에서 연이어 우승을 거머쥠으로써 스타덤에 올랐던 피아니스트. 현재 모국 아르헨티나의 ‘아르헤리치 페스티벌’과 일본 ‘벳푸 페스티벌’의 음악 감독으로 활동 중이기도 하다.

아르헤리치는 연주를 펑크내기로 유명한 음악가로 기획자를 애먹이는 연주자 중 한 명. 2년 전에도 뉴욕 필과의 공연을 펑크 낸 적이 있어 뉴욕 필 측에서는 그가 리허설을 위해 들어서는 그 순간까지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내게 주어진 임무는 아르헤리치가 리허설에 꼭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었고 ‘그가 공연을 하고 싶어한다면 리허설에 나타날 것’이란 매니저의 말에 속수무책으로 공연장에 나타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공연을 펑크 낸 적이 언제 있었냐는 듯 리허설 30분 전에 공연장에 도착한 그는 까다롭고 일하기 힘들다는 세간의 소문과는 달리, 정말 마음씨 좋은 털털한 아줌마 같은 인상이었다. 그러나 “리허설을 무사히 끝내도 최상의 컨디션이 아니면 언제든 공연을 취소하는 유일한 피아니스트”라는 뉴욕 필 매니저의 말에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이때 갑자기 아르헤리치가 나를 찾아서는 “날씨도 좋으니, 커피나 한잔 하자”고 얘기하는 것이 아닌가. 원하는 사람 이외에는 접촉을 꺼린다는 아르헤리치가 내게 할 말이 무엇이었던가.

우리는 길거리에 앉아 3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든가, 엄마한테 자주 전화하라는 등의 수다를 떨었다. 그러면서 아르헤리치가 대가 피아니스트에서 한 여성으로, 친구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면이 있기에 그의 연주에서 따뜻함이 흘러나오는 것이 아닐까.

아르헤리치는 3번의 공연 모두 매진되며 연주를 무사히 마쳤다. 마지막 공연을 마친 그가 나에게 말했다. “엄마한테 잘 하고, 내 안부 전해 드려라”라고. 아마도 엄마와 멀리 떨어져 사는 내가 자신과 딸의 관계처럼 느껴져서였을까?

일로 만났지만 사석에서 만난 사람처럼 진심으로 나를 대해준 아르헤리치. 그의 이름은 내 마음속에 유명한 피아니스트라기보다는 따뜻한 인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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