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은 즐거운 ‘생쇼’다”

대중으로부터의 주목을 통해 거꾸로 미술계의 시선을 받게 된 아티스트가 있다. 한 인터넷통신 서비스 회사의 TV광고에 나와 고양이와 함께 신나게 탭댄스를 추던 ‘낸시랭’(27·본명 박혜령)이 그 주인공. 미술계뿐만 아니라 10∼20대 사이에서 문화적 아이콘으로까지 부상한 그는 회화에서 설치, 퍼포먼스뿐 아니라 패션 디자이너, 아트 디렉터, 모델, 방송 진행자, 패션 칼럼니스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번엔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기존 미술계에 대한 ‘도발’적인 단상을 모은 미술 에세이집 ‘아티스트 낸시랭의 비키니 입은 현대미술’(랜덤하우스중앙)을 출간해 다시 한번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예술도 비키니처럼 가벼웠으면 좋겠어요. 깃털처럼 가벼워 어디든지 훨훨 날아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라는 그의 말은 소수 미술 애호가만을 위한 기존 미술시장과 미술대학 중심의 아카데미즘을 거부하는 생각을 보여준다. 모나리자와 마돈나가 프린트된 비키니 의상을 입고 총을 든 작가의 모습을 담은 책 표지가 도발적이다. 그는 “미술은 쇼다. 그것도 ‘   ’ 가게 만드는 ‘생쇼’여야 한다”면서 어려운 말로 채워진 딱딱한 서양미술사를 던져버리고 자신만의 시각으로 ‘섹시하고 유쾌하게’ 미술을 즐긴다. ‘고리타분한 미술 읽기에 대한 발칙한 도발’이라고 부제를 붙인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미술을 읽는 그의 시선은 ‘비틀기’. 알타미라 동굴벽화와 밀로의 비너스에서 현대 팝 아트를 주도하는 앤디 워홀과 매튜 바니에 이르기까지 유명 작품들의 패러디는 보는 즐거움을 더한다. 밀로의 ‘비너스’에게 “선물을 하겠다”면서 로봇 팔을 달고 명품 가방을 들려주는가 하면 “비너스는 신들이 데리고 놀려고 만들어낸 섹스용 사이보그”라면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사이보그로 대체시켰다. 가톨릭이 여성 성직자를 받아주지 않는 것을 비판하며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하는 여성 교황의 모습을 연출하는 퍼포먼스도 시도한다.

“아이 러브 달러”라거나 “루이뷔통 가방을 좋아한다”는 등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 돈과 명품 숭배를 감추지 않는 솔직함을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마냥 가볍기만 한 것은 아니다. “미술이란 제도화된 욕망”이라는 미술론을 내세우고 “말 잘 듣는 여성, 현모양처면서 커리어 우먼인 ‘수퍼우먼’ 등 남성 사회가 만들어낸 판타지 속에서 여성의 미가 왜곡되어 왔다”는 주장을 펼 때는 사뭇 진지함을 보인다. “‘팜므파탈’ 이나 ‘여전사’ 캐릭터는 아름다운 여성이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는 무능한 남성들이 만들어낸 보호본능”이라며 냉소를 날린다.

뉴욕에서 태어나 홍익대 서양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그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거리 퍼포먼스. 초대받지 않은 관광객에 불과했지만 빨간 하이힐과 란제리 차림으로 얼굴에 하얀 분칠을 하고 거리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한 ‘초대받지 않은 꿈과 갈등: 터부 요기니 시리즈’라는 이름의 퍼포먼스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Fly me to the paradise’(2001, 덕원미술관), ‘Energy Flow’(2002, 관훈갤러리), ‘터부 요기니 시리즈’(2004, 갤러리드맹), ‘아티스트 낸시랭의 비키니 입은 현대미술’(2005, 갤러리쌈지) 등 네 번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2004년 광주비엔날레와 서울파인아트페스티벌 등에서 고정관념을 깨는 과감한 노출의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이런 그의 행동들은 ‘예술과 사기의 절묘한 조화’라는 비난도 받지만 그는 “지난 2000년간 예술은 거의 사기였다”고 응수한다. 자주 벗는 데 대한 세간의 말들에도 “욕망이 무슨 죄냐, 욕망을 포장하는 권력이 죄지. 나는 벗는 것으로 입는다”라고 외친다. 낸시랭 지음/ 랜덤하우스중앙/ 1만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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