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라인 재단법과 함께 나는 특별히 염료와 문양, 장식들에도 신경

을 썼다. 물론 나는 한복에 대한 공부를 체계적으로 해본 바 없다.

내가 한복 가게를 낸 것은 어떤 이론적인 체계를 밑받침으로 해서가

아니라 그저 내 바느질 솜씨에 반한 많은 사람들의 권유에 의해서였

다. 그러나 한번 시작했으면 끝을 보는 성격인지라 나는 나름대로 연

구도 많이 하고 공부도 했다.

한복과 관계되는 분들의 책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아무리 어려워도

다 사서 읽었다. 석주선 선생님이나 유희경 선생님 책 같은 것은 한

문이 너무 어려워서 -내 한문 실력이 아주 엉망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 옥편 찾다 시간 다 보낼 정도였지만 챙겨 읽었다. 한복에 관한 한

어떻게든, 무엇이든 알려고 애썼고 노력했다.

특히 칠십년대 후반부터 딸이고 며느리를 끌고는 일본 문화여자대학

의 하계학교, 동계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를 했다. 문화여자대학 안의

복장학원은 뉴욕의 에프아이티, 유럽의 에스모드와 함께 세계에서 손

꼽히는 의류교육기관들이다. 복장학원에서는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색, 디자인은 물론이고 데생 같은 미술 교육과 함께 재단법이나 염색

걋?여러 ≠嗤?가르치는데, 나는 주로 색에 관한 공부를 했다. 스

타일과 염색도 좀 했는데, 염색을 좀더 본격적으로 공부한 것은 우리

딸이다. 딸 의숙이는 대학을 졸업한 뒤에 새로 한복 공부를 시작해

지금 배화여전 전통복식과 교수로 있다.

초기 ‘이리자 한복’의 색깔이나 문양은 내 상상에서 만들어져 나

온 것들이 많다. 칠십년대만 해도 골동품이니 우리 옛문화에 대한

관심이 지금보다 저조할 때였고, 참조할 만한 자료도 눈에 띄지 않을

때였으니 어쩔 수 없기도 했다. 수선생들과 함께 -우리 집에서 일하

는 사람들은 모두 선생님이라 부르는 것이 내 원칙의 하나였다- 의논

해 가며 실험해 가며 만들어나갔다.

금박도 찍어냈다. 옛날에야 아무나 금박 찍은 치마저고리를 입었겠

는가. 그런 탓에 그 옛날 문양조차 구하기가 쉽지 않아 어렵게 구한

옛문양과 내가 디자인한 것들 해서 수백개를 향나무에 파서 찍어 냈

다.

그 금박을 사람들은 지워지지 않아서 좋다고 평을 하는데, 사실은

드라이크리닝을 한번 하고 나면 색깔이 변한다. 옛날처럼 금가루를

직접 옷에다 박는다던지 금직을 하는 게 아니라 화학염료를 쓰고 금

종見?두드려대니 아무래도 오래도록 제 색을 지니고 있기가 힘든

것 같다. 그래 물로 빨아도 괜찮고 드라이크리닝을 해도 괜찮은 금박

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명함에 로고 찍을 때 쓰는 금박이 생각났다.

75년인가 76년 무렵인데 인쇄소 사람에게 문양 너댓개를 주면서 그

일을 부탁했다. 열처리하는 것까지 개발해서 우리 옷에 막 찍어낼 무

렵, 그 인쇄소에서 다른 가게 옷에까지 그 금박을 막 찍어주더니 그

기술은 금세 내 손을 떠나 온 한복계로 확산이 돼버렸다. 이른바 특

수금박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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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런 다양한 시도를 두고 학계에서는 전통을 파괴한다고 말

이 많았다. 그러나 옷이란 시대를 반영한다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

었고, 좋은 옷을 만들려고 정말 열심히 일했다. 옷감을 구하느라 동

대문 시장을 헤매고다니기 일쑤였고, 내가 원하는 색을 얻기 위해 옷

감 짜는 공장도 수없이 들락거렸다. 칠십년대 초에 궁중의상을 만들

때에는 적당한 옷감이 없어서 옛날 이불단들을 뜯어서 아플리케로 만

들기도 했다.

국내외를 불문하고 수없는 한복 패션쇼를 열었지만 아무래도 가장

의미있는 것은 첫번째일 것이다. 75년에 조선호텔에서 ??이 무대

의상 발표회에는 사람들이 얼마나 몰려들었는지 호텔이 무너질 뻔했

다는 소리까지 돌았다.(엄밀한 의미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복 패션

쇼를 기획하고 연 사람은 세종대학 교수로 계시던 손경자씨다. 학생

들과 함께 국내외에서 여러번 그런 패션쇼를 개최하셨다. 그러나 그

분이 학자적인 입장이었다면 나는 한복 디자이너로서의 입장이라는

점에서 좀더 본격적인 한복 패션쇼가 아니었나 싶다. 손교수님은 뒤

에 나를 찾아오셔서 바느질 솜씨가 좋다며 칭찬과 격려를 해주셨다.)

78년의 베옷 발표회도 생각하면 감회가 깊다. 그때부터 나는 한복

전시관을 염두에 두고 모시며 삼베, 무명, 명주 따위 온갖 옷감을 모

으고 있었다. 그 옷감들을 가지고 한복을 지었는데, 유명한 화가나

서예가의 그림과 글씨 들을 무늬로 넣었다. 김기창 화백, 여천 선생,

이철경 선생, 홍석찬씨 같은 대가들이 주신 작품을 치마폭에 그대로

받기도 하고, 바느질해 염색하기도 했다. 그림과 글씨뿐만이 아니라

매듭이며 자수도 그 방면의 대가들로부터 직접 작품을 받아 그 발표

회에 잘 활용했다. 작품료도 변변히 못 드렸지만 한복 전시관의 취지

에 기꺼이 응해 주셨던 그분들께 지금도 감사드린다. 지금 그 귀한

작품들은 전시관에 소장, 전시되어 있다.

84년의 생활복 발표회는 그 전까지 주종을 이루었던 무대복이나 연

회복에서 탈피한 옷들이라는 점에서 또 의미있다. 한복이란 포멀한

옷이다. 이것을 좀더 캐주얼하게 만들어 입을 수 없을까 생각 끝에

만든 옷들이 생활복이었다. 대학 캠퍼스복, 공항이나 호텔 가이드들

의 옷, 백화점이나 음식점 종업원들의 옷들을 디자인한 것이다.

그 해에 나는 우리옷 협회라는 한복인 모임을 하나 결성했다. 사단

법인 한복협회라고 지었던 것을 석주선 선생님께서 우리 옷인데 한복

이 뭐냐, 우리옷이라 해라 하셔서 그리 지었던 것이다. 그때 회원들

이 모여서 이룬 첫 사업이 생활복 발표회다. 2회부터 5회까지는 신인

공모전을 개최해서 신인 한복 디자이너들을 많이 발굴했다.

86년에는 삼국시대에서 조선 후기까지의 우리옷을 한 자리에서 선보

이는 발표회를 했다. 궁중의상과 양반가의 옷, 평민복을 함께 만들었

는데, 복식학자들한테 일일이 고증을 받아 했다. 석주선 선생님은 물

론이고 유희경 선생님과 고복남 교수 같은 분들이 큰 도움이 되어 주

甄? 유희경 선생님은 뒤에 내가 수의를 만들 때 여러 가지 고증을

해주셨고, 고복남 교수는 방송통신대학에 있는 백영자 교수와 함께

서울대학교 학생 시절에 우리 가게에 많이 다녔던 이들로, 나한테 바

느질 개인교습을 받았다.

칠십년대 후반에 나는 지금의 사간동 자리로 가게와 집을 옮겼다.

도시개혁으로 국제극장과 함께 일대가 정비되면서 우리 가게도 뜯긴

다는 소리가 있어 마침 친분이 있던 앙드레 김의 집을 사서 옮겨왔

다. 조그마한 한옥으로 참 초라한 집이었는데 손을 좀 보고는 가게

겸 공장으로 썼다. 좀 뒤에 이층짜리 뒷집을 사서 그 이층에 살림집

을 꾸며 우리 식구들도 이사를 왔다.

한참 강남붐이 인 것이 팔십년대 들어서일 것이다. 가게들이 거의

강남으로 이사를 가고 상권이 그쪽으로 옮겨가자 나도 덩달아 강남

쪽으로 가고 싶었다. 강남에 한복 가게들이 들어서자 그 동네에 사는

손님들 중에 많은 이들이 굳이 사간동까지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

런데 남편이 반대를 했다. “당신은 전통의상 하는 사람이니까 거기

에 걸맞게 살아라, 젊었을 때 열심히 일해서 웬만한 명성도 얻고 했

으니 그 손님들에게 봉聆求?자세로 살아라” 그러시는 것이었다.

결국 강남행을 포기했는데, 사실 나는 좀 괴로웠다. 항상 앞서서 활

동하던 사람이었던지라 상대적으로 소외감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렇

게 한 오륙년을 침체한 상태로 지냈다.

그렇지만 남편 말대로 변함없이 이리자를 찾는 분들이 내게 힘을 주

셨다. 이 정부가 들어서면서 규제도 풀려서 집도 새로 짓고 전시관도

작게나마 마련할 수 있게 된 것도 내게는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나로서는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한 사람의 손님으로서 그 사람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한복을

만드는 일이 더 중요했다. 그렇게 옷을 만들어 드리면 고마워하고 그

래서 지금도 이리자 한복이 아니면 안 입는 분들도 여러 분이 계시

다.

한 25년쯤 전일까. 임영신씨가 세계 만국 교육자대회에 참석하신다

고 오셨다. 그런데 순식간에 디자인이 떠올랐다. 남치마에 옥색 저고

리가 좋겠는데, 자칫 나이들어 보일 수 있으니 노랑 저고리를 입으시

라, 어깨하고 치마 밑단에 우아한 십장생 학수를 놓겠다고 하자 기겁

을 하시는 것이었다. 에이라인 재단으로 가뜩이나 넓고 화려한 치마

에 그런 무늬는 보통 사람이 입는 옷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안 입겠다

는 것이었다.

그 양반이 좀 뚱뚱하셨다. 그래 나로서는 좀 젊어도 보이고 날씬하

게도 보이게 하느라고 참 애를 썼다. 그래놓고는 마음에 안 드시면

다른 옷도 해입으시라고 돈도 안 받았다. 그 분이 다녀오시더니 아주

인기있고 예쁘다는 칭찬을 받았노라고 선물까지 사오셨다. 그리고는

그 뒤에 몇벌 옷을 해 입으셨다.

역대 영부인들의 한복을 지었던 것도 내겐 보람있는 일로 남는다.

육영수 여사는 대지주의 따님답게 침모를 두고 계셨는데, 그 탓에 한

번도 내게 오셔서 옷을 지으신 적이 없다. 다만 그 침모 분이 가끔

들러서 이런저런 디자인이며 무늬들을 보고 가셔서 지은 옷들이 있는

걸로 안다. 또 다른 이들이 근혜양이나 육여사께 선물한다고 우리 집

에서 옷을 지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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