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수상하다고 한다. 봄 가을이 사라지고 여름과 겨울만 남았다고들 한다. 그러고 보니 봄이 와도 화창하다는 느낌이 드는 날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겨울이라고 하기엔 좀 뭣하지만 은근히 싸늘하거나 을씨년스럽거나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여름처럼 더워진다. 게다가 최근 몇 년 사이에는 황사까지 끼어든다.

덕분에 요즘엔 봄옷이 필요 없다. 겨울옷에서 여름옷으로 직행이다. 하지만 봄이란 말이 남아있는데 봄이 어디 아주 가랴. 확 짧아지긴 했지만 봄은 어김없이 존재한다. 툴툴대는 사이 슬그머니 왔다가 번개같이 가버려서 탈일 뿐. 그러므로 봄을 맞으려면 내 쪽에서 부지런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말기를.

지난 한 주일 난 무척이나 부지런을 떨었다. 마치 올해도 제대로 봄을 보지 못하면 큰일이라도 날 듯이 결사적으로 봄을 찾아 나섰다. 일주일이 딱 일곱 날인데 그 중에 나흘을 바쳤으니 말 다했지.

친구와 함께 청계산에 간 날은 간만에 화창했다. 집에서 반시간도 안 걸리는데 무슨 일로 분주했었는지 작년엔 진달래를 놓쳤었다. 이 게으른 손님을 진달래 능선은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맞아주었다. 키도 훌쩍 자라 있었고 꽃도 훨씬 더 탐스럽게 매달려 있었다. 고맙고 고마워서 공연히 눈물을 찔끔거렸다. 산에는 진작 봄이 와 있었는데 공연히 날씨 타령을 했구나 싶었다. 봄날의 산은 적당히 조용했고 적당히 따뜻했고 적당히 선선했다. 길목의 굴다리 아래서는 겨울옷을 잔뜩 껴입은 아주머니들이 봄나물을 팔고 있었다.

여고 동창회에서 도자기마을을 탐방하기로 한 날은 지독한 황사가 예고됐었지만 다행히 빗나갔다. 화창한 봄날을 연 이틀이나 누리다니 올해는 좋은 일이 많으려나 보다. 바쁘다는 핑계로 좀체 끼어들지 않던 모임에 선뜻 들어선 건 도자기라는 테마도 매혹적이었겠지만 그보단 나이 덕분일 게다. 대부분은 손자를 본 할머니들일 텐데 왁자지껄 웃고 떠드는 모습들은 꼭 봄 소풍 떠나는 중학생들 같았다. 광주, 이천, 여주는 각기 다른 내용의 도자기 박물관을 갖고 있었다. 박물관마다 전시 내용도 다채로웠으려니와 조경도 훌륭해서 모두들 감탄사를 연발했다. 바깥을 기웃거리는 동안 안에서 이렇게 컸구나 싶으니 많이 미안하고 많이 흐뭇했다. 먼 산에 핀 진달래들을 눈이 시리도록 볼 수 있어 더 좋았다.

주말엔 이틀 동안 영주와 안동을 돌았다. 올해 초 마치 번개팅처럼 만났던 병술년 개띠 친구들 여덟 명의 모임이었다. 공통점이라곤 여자라는 것, 그리고 개띠라는 것밖에 없다. 아참, 나만 빼곤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사람들이라는 점도 있지. 원래 아홉인데 한 명은 이 날까지 너무 바빠서 못 왔다. 아무튼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사이들이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람. 말 통하고 기분 통하면 됐지.

부석사와 하회마을은 이미 여러 차례 다녀왔지만 이번 여행은 좀 달랐다.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에 깊은 조예가 있는 멤버가 안내와 지도를 맡았기 때문이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더니 과연 그랬다. 여행길 내내 꽃향기에 취해 다녔는데 그 중에서도 도산서원의 매화향기는 압권이었다.

늙은 등걸에 피어난 꽃이 훨씬 아름답다는 것도 새삼 느꼈다. 그런데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심었다는 그 삐쭉한 나무는 왜 그 자리에 있는지. 무슨 정치적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미학적으로 누가 봐도 어울리지 않는 자리이기에 하는 말이다. 그리고 하회마을에서 서애 류성룡의 종택 충효당을 지키는 종부 최 할머니를 만난 건 또 하나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어린아이처럼 맑고 고운 얼굴의 최 할머니에게선 매화보다 더 향기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여성의 기품이란 이런 것이로구나.

봄은 사라진 게 아니었다. 천지에 봄이었다. 다만 내가 봄에게 곁을 주지 않았을 뿐. 지난 나흘간의 부지런한 봄맞이에서 얻은 기운으로 난 올 한 해를 넉넉히 보낼 것 같다. 여러분도 나처럼 수익률 높은 투자를 해보심이 어떨지요? 염장을 질렀다면 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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