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키의 여자라면 지하철에서 짐이 아주 무겁기 전에는 짐칸에 가방을 올려놓고 싶어 하지 않는다. 짐을 올려놓기 위해서는 까치발을 하거나, 여차하면 가방 안의 내용물이 쏟아질 것을 각오하고 두 팔로 번쩍 들어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보통 키의 남자라면 이러한 어려움을 별로 느끼지 않고 무난하게 짐을 올려놓을 수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왜 여자가 느끼는 불편을 남자는 느끼지 않는가. 이는 짐칸의 높이가 여자 키에 비해 높게 정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남자의 신장을 기준으로 짐칸의 높이를 정한 결과 남자보다 10㎝ 이상 작은 여자들은 남자들이 느끼지 못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저출산으로 나라가 근심에 쌓여 있다. 자기 혼자만의 생계유지도 버거워 배우자와 가족을 이루고, 애를 낳아 키우는 일들은 큰 결단이 필요한 부담스러운 일이 되었다. 이처럼 아이가 귀해진 세상에도 남아선호사상은 여전히 남아 있다. 2004년에 태어난 출생아 총 47만6052명 중 남아는 24만7399명 여아는 22만8653명으로 출생성비는 108.2이다.

자연상태에서의 성비로 알려진 104∼106을 상회하는 수치이다. 셋째 아이의 경우 남아는 2만5892명, 여아는 1만9507명으로 성비는 더욱 커져 132.7에 육박한다. 정상 성비를 105로 가정할 때 셋째 아이의 경우 남아가 5410명 더 태어났다. 거꾸로 말해 여자로 태어났을 태아 5410명이 사라졌다.

통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통계수치 자체가 없거나 무시될 때 정책의 수립은 정확성을 결여할 수 있다. 지하철의 짐칸 높이와 같이 남성만의 통계수치를 갖고 정책이 수립된다면 여성이 정책의 수혜를 덜 받게 됨은 자명한 이치이다. 남성과 여성의 다른 상황과 특성을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어야 사회현상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적합한 정책의 수립이 가능하다. 또한 출생성비에서 보듯이 여성에 대한 차별을 증명(?)하기 위해서 통계보다 더 좋은 도구는 없어 보인다.

이와 같은 배경 아래 국제적인 이슈로 등장한 성 인지 통계는 최근 한국의 여성정책의 전개에 필요한 중요한 도구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성 인지 통계는 협의로는 개별 차원(individual level)에서 성별로 분리되어 있는 통계를 의미한다. 광의로는 여성과 남성이 처한 상이한 사회적 조건과 사회적 기여, 남녀의 다른 필요와 문제를 반영한, 사회의 모든 측면에서 성별로 불평등한 상황을 보여주고 이를 철폐하기 위해 생산되는 모든 통계를 말한다.

성 인지 통계의 생산과 배포, 활용이 여성정책의 기초가 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개별 수준에서 성별로 생산되지 않거나 분석·발표되지 않는 통계들이 남아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지방의회 선거를 앞둔 이 시점에도 16개 시·도의 연령별 경제활동 상태와 교육별 경제활동 상태에 대한 통계가 성별로 분리되어 발표되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 최근에 진행 중인 통계법 개정안에 ‘조사문항에 성별문항을 포함할 것’을 명문화한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이 내용이 법으로 확정되어 국가에서 생산하는 모든 통계에 적용된다면 더 이상 성 인지 통계의 부재로 인해 발생했던 차별은 존재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여성을 말해주지 않는, 결과적으로 여성을 차별하는 통계에서 차별을 보여주는 통계로의 대전환이 기대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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