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 나 뭐 할 일 없을까. 언제까지 살지 모르는데 계속 이렇게 아무 것도 안 하고 살아야 한다면 정말 심심할 것 같아.”

결혼 이후 얌전하게 전업주부로 살아온 한 대학동창이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 친구는 전업주부가 적성이자 능력일 정도로 뛰어난 살림꾼에다 항상 쾌활한 성격이었던지라 그 자리에 있던 친구들은 잠깐 어리둥절했다.

“여태까지 살림하느라고 힘들었는데 이젠 좀 놀멘놀멘 살지 나이 육십에 새삼스레 무슨 일이냐?”

계속 사회활동을 해온 다른 친구들은 그렇게 가볍게 손사래를 쳤지만 나는 그 친구의 심정이 충분히 헤아려졌다. 죽을 때까지 무슨 일을 하고 살아야 하나 하는 걱정은 생계가 보장된 중산층 주부가 괜히 관심을 끌려고 부리는 응석이 아니라 평균수명 여든에 달한 장수시대를 살아가는 신노년세대의 코앞에 닥친 심각한 문제다.

여자가 나이가 육십쯤 되면 자손들에게 둘러 싸여 손자 재롱이나 보며 여생을 보내던 호시절은 물 건너갔다. 지금은 둘러 쌀 자손도 몇 안 되는 데다 재롱 떨 손자는 더더욱 드문 시대다. 다행히 돈과 건강이 뒷받침되어 준다 해도 자칫하다가는 앞으로도 몇 십 년을 무위와 고독에 몸부림치다 죽을지 모른다.  

물론 사회에서는 아직까지 노년의 삶의 질에까진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 당장 버려진 노인들, 굶는 노인들 거두는 것만 해도 힘이 달리는 판에 웬 사치스런 고민이냐고 핀잔 듣기 십상이다. 그러니 현재 먹고 살만하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사람들은 각자 알아서 자신의 삶을 기획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는 나라고 뭐 뾰족한 아이디어가 있으랴마는 지난번 뮤지컬 ‘프로듀서스’를 보면서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사기성이 농후한 뮤지컬 제작자가 돈 많은 유대인 할머니들을 섹스로 꾀어서 투자하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유대인을 비하한 것도, 나이 든 여자들을 비하한 것도 굉장히 불쾌했지만(그래서 당장 글로 써서 욕해야지 하고 마음 먹었는데 너무 열심히들 공연하는 모습에 져서 포기했다) 결과적으로 문화와 예술의 강력한 서포터스로서의 여성의 힘을 인정하게 만드는 부수 효과는 있었던 셈이다. 실제로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흥행에 성공하느냐 못 하느냐는 나이 든 여성 관객을 얼마나 많이 동원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하잖은가. 시간 많고 돈 많은 그네들의 입소문이 가장 강력한 마케팅이란다.

간단히 말해 예순 이후의 여자들이 문화와 예술의 후원자로 여생을 보내면 어떨까 하는 제안이다. 그렇다고 뭐 재벌가의 여자들처럼 큰돈을 들여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지으라는 말은 아니다. 그냥 내 능력이 닿는 범위에서 적극적으로 문화생활을 즐기자는 말이다.

이젠 한 푼이라도 더 자녀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지갑을 꽁꽁 묶어 놓지 말고, 친구끼리 또는 혼자서 영화관이나 극장, 전시회와 음악회, 무용공연 등에 열심히 자주 가자는 말이다. 천만 명이 보았다니까 그제야 따라 보지 말고 내가 먼저 작은 영화들을 봐주는 센스를 발휘하면 어떨까. 죽기 전에 명품 핸드백을 꼭 들어보겠노라는 욕심 대신 가난한 무명화가의 그림을 사주는 건 또 어떨지. 나중에 대박을 터뜨릴지도 모르잖는가.(책을 보라는 말은 참겠다. 쉰만 넘으면 노안 때문에 신문도 못 읽는다는 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어서)

지금 예순둥이들은 젊었을 때 무에서 유를 이루느라고 삶을 즐기지 못한 팍팍한 세대이다. 남자건 여자건 가족 먹여 살리고 뒷바라지하느라고 남은커녕 자기 자신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예순 이후에는 좀 다르게, 사치를 부리며 살아 보는 것도 멋진 일이 아닐까.

남을 위해서 봉사하는 삶은 그럴 수 없이 좋다. 나이 들어서 본격적으로 사회복지를 배우고 봉사활동에 나서는 사람들을 보면 진심으로 존경심이 우러난다. 부럽기도 하다.

그렇지만 적극적인 문화생활로 자신과 남의 삶을 두루 풍요롭게 만드는 노년도 역시 아름답다. 그럴 때 노년은 사회의 짐이 아니라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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