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초입 대한적십자사 맞은 편 소담스러운 2층 흰 건물. 한때 안가 건물로 활용됐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이 곳이 바로 서울의 문화혁명을 꿈꾸며 연극인 유인촌(54)씨가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는 '서울문화재단'이다. 서울시가 500억 원을 출연해 만든 문화재단의 초대 이사장직을 맡아 지난 1년간 행정 경영자로 뛰어온 그는 5월 1일부터 시작될 '하이 서울 페스티벌' 축제와 5월 18일 재단 출범 1주년 기념행사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피로로 다소 충혈된 그의 두 눈은 서울의 '문화혁명' 가능성을 얘기하는 순간부터 눈에 띄게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각계각층 '소통'이 최대 난제, 발로 뛰며 해결

정치적 오해 신경 안써…

임기 끝나면 본업복귀

사후지원·거리예술가 인증제 등 문화지원 넓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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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범 초기엔 민예총, 문화연대 등 민간단체들이 재단과 이사장 선임 절차에 대해 이의를 제기해 한 3∼4개월은 열심히 발로 뛰고 관계자들을 만나 얘기하는 데 다 보냈어요. 문화예술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시민단체, 공무원 사이에 '소통'이 가장 큰 문제임을 실감했습니다. 사실 난 다른 재주는 없는데 '몸으로 때우는 것'엔 자신 있거든요(웃음)

TV 드라마 '전원일기'의 김 회장 댁 둘째 아들로 대중에게 각인된 유 이사장은 30년 넘게 연기인으로 살아오는 한편, 모교인 중앙대에서 연극학과 교수로 후학도 양성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10년 전 극단 '유'를 창단해 '문제적 인간 연산'으로 돌풍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꾸준히 연극판을 확장해 왔다. IMF관리체제 여파로 한창 힘든 99년 강남 청담동에 연극 전용극장 '유시어터'를 만들었고 이를 지역으로 확대, 지난해 9월엔 강원도 평창 봉평의 한 폐교에 '덕거 연극인촌'을 형성해 달빛극장을 개관하기까지 했다. 이러니 일각에선 그를 '문화 CEO'라 부를 만하다.

예술가들 만나면 가장 많이 하는 얘기가 뭐일 것 같아요? 바로 돈 얘기예요. 그래서 지원 방식도 선택과 집중 원칙에 따라 합니다. 생색내기나 구색 맞추기 식의 소액 다수 지원을 탈피해 소수라도 확실히 지원해 준다는 거죠. 출범 1주년 기자회견에서도 밝힐 예정인데, 결과를 보고 '사후' 지원을 하는 방안도 검토 중입니다.

또 5월 중 거리의 예술가들을 오디션을 통해 1년간 인증해 주는 방안도 생각 중입니다. 이렇게 되면 서울 시내 요소 요소에 연주를 하고 무용과 마임을 하며 초상화를 그리는 예술가들이 넘쳐나겠죠. 생각만 해도 서울이 참 재미있어질 것 같지 않습니까?

이명박 서울시장이 재단 이사장직을 제안했을 당시 잘 할 자신이 없다고 고사했던 유 이사장은 잘 하기보다는 바르게 재단을 운영해 달라며 서울을 인간이 가장 중심이 되는 도시로 만들겠다는 이 시장에게 결국 설득 당했다고 한다. 초기 재단의 자율성에 대한 지인들의 우려나 이 시장의 측근으로 보는 색안경 낀 시선에 마냥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사실 정치권으로부터 심심찮게 러브콜을 받고도 거절했던 그는 시시콜콜 정치적 오해를 염두에 두고 일하지는 않기에, 또 정치는 자신의 일이 아니기에 일이 끝나면 미련 없이 원래의 내 자리로 돌아간다는 확신이 있기에 더 당당하다.

서울라이트, 즉 서울시민의 이미지는 어떠해야 할까, 늘 고민합니다. 이 각박하고 바쁜 세상 속에서 배고파도 옆 사람에게 먼저 양보할 줄 아는 너그러움, 화가 나도 우선 참는 인내심, 한마디로 '여유'로운 이미지가 됐으면 합니다. 그래서 이런 이미지가 서울에 살 수 있는 일종의 자격 요건이 레테르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이런 맥락에서 10월 완공될 청계천 복원을 대규모의 건설 역사라기보다는 하나의 상징적인 문화 사건으로 본다. 콘크리트 포장을 걷어내고 도시 생태를 복원해내는 일은 도시에 생명을 부여해 시민들의 정서를 새롭게 변화시키는 작업이라는 설명이다. 지난해 시도한 시청 앞 스케이트장도 권위적인 행정기관의 이미지를 걷어내고 시민과 시를 심정적으로 한층 가깝게 연결해 주는 작업이었다고 덧붙인다.

문화란 기본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바꾸고 정신을 정화시키는 일입니다. 수십만 원짜리 수입 오페라를 본다고 해서 갑자기 문화적 소양이 생길까요? 지금처럼 존경할 지도자가 드물고 불신의 벽이 높은 시대에 '믿음'이야말로 문화의 가장 굳건한 토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토대로 우리 문화를 바꿔나가는 데는 족히 10년 이상의 세월이 걸리겠죠. 그래서 꼭 해보고 싶은 일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 사회 리더들이 시민들과 약속을 하고 이를 지켜나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신뢰를 쌓아 가는 이벤트입니다. 시에 한번 강력히 제안해 볼 계획입니다

샤머니즘 시대엔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고 그 모아진 마음으로 소원을 기원하는 일을 주관한 제사장이 바로 배우였다고 믿는 유인촌 이사장. 서울의 문화 변혁을 위해 그가 시도할 새로운 제사장 역할은 얼마나 될까, 한껏 궁금해진다.

글=박이은경 편집국장pleun@

사진=이기태 기자 lee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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