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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안쪽 길은 널찍하고 반듯합니다. 나무에, 꽃에, 분수가 춤추는 작은 공원도 있습니다. 하지만 팽이 돌리고 인형놀이 하는 아이들은 없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눈에 띄지 않습니다. 싹싹 비질하는 사람은 제복 입은 청소 아줌마입니다. 옛날 동네 사람들은 이제 여기 살지 않습니다…여기는 사직동이지만 나의 사직동은 아닙니다. 나의 사직동은 이제 없습니다” ('나의 사직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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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간 살았던 고향 같은 동네 사직동을 자신의 그림책 속에 고스란히 담아낸 그림책 작가 한성옥씨. 옥인동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영원히 기억될 '나의 사직동'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이기태 기자 leephoto@womennews.co.kr>

출판된 지 2년이 다 돼가는 그림책 '나의 사직동'(보림)을 다시 꺼내 보았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도심 속에 숨겨져 있던 정겨운 골목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책을 그린 그림책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한성옥(47)씨는 1년에 걸쳐 자신이 30년 넘게 살아온 집과 동네가 재개발로 사라지는 과정을 꼼꼼히 담아냈었다. 다큐멘터리적 사실감을 살리기 위해 실제 사직동 풍경과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을 촬영한 뒤 연필과 수채화로 리터치 작업을 했다. 그는 이 책으로 아동도서의 노벨상으로 비유되는 2005볼로냐국제아동도서전 선정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 상 논픽션 부문의 첫 한국인 수상자가 됐다.

“삶의 본질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해 괴로워할 때 주위 사람들이 날 이해하지 못하는 걸 보면서 사람과 소통하는 것에 대한 희망을 버렸었죠. 우연히 찾아간 교회에서 해답을 얻었어요. 내게 있어서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방법은 조형언어(일러스트)라는 것을요”

일러스트 개념이 국내에 도입되지도 않았던 80년대 초반 그는 마치 신의 계시를 받은 사람처럼 미국유학을 떠났다. 미국 FIT(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와 SVA(School of Visual Art)에서 일러스트레이션(석사)을 전공하고 미국 출판시장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작가와 편집자들의 들러리에 불과한 잡지 일러스트레이터에서 비전을 찾지 못했다. 그 때 그가 가능성을 찾은 것이 바로 '그림책'. 일러스트레이터의 역량이 작가적 대우를 받을 수 있는 분야였다.

“내 젊은 날의 고민을 풀어줄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림책이었죠. 어린이들, 어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작업이었으니까요. 모든 것이 빠르게만 돌아가는 이 시대에 생각할 여지를 만들어 주는 그림책은 앞으로 중요한 장르로 인정받을 게 틀림없어요”

국내 여성 일러스트레이터에게 세계시장 진출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도 바로 한성옥씨다. 2000년 작품 '피터와 늑대'와 2004년 작품 '시인과 요술 돌멩이'로 미국일러스트레이션협회상을 받았고 '시인과 여우'는 미국 이르마·제임스 블랙상 명예상 수상과 동시에 뉴욕타임스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뽑혔다. 2002년에는 '수염 할아버지'로, 2004년에는 '나의 사직동'으로 연달아 문화관광부 장관상을 받기도 했다.

“그림책을 아이들만 읽어야 한다는 생각, 그림책은 파스텔톤의 동화나라만 담아야 한다는 생각 버리세요. 아이들이 느끼는 자신들의 현실 역시 어른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어요. 도시 재개발 문제요? 아이들도 자본의 논리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것이 우리의 소중한 것을 어떻게 순식간에 파괴해 버렸는지 알아야해요”

한성옥씨의 이러한 '그림책 철학'은 그래서 매력적이다. 그는 늘 처절한 현실 속에 놓인 아이들의 입장에서 소재를 찾고 책마다 기법과 색채, 표현방법을 달리해 한 권의 작품을 만들어 낸다.

“그림책 일러스트레이터 중에 여자가 많은 이유요?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게 여자니까 남자들보다 아이들의 마음을 더 잘 알기 때문이죠. 프리랜서라는 직업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고요. 우리 같은 선배 멘토들이 길을 잘 닦아놔야 후배 멘티들이 더 넓은 세계에서 자신들의 실력을 맘껏 펼칠 수 있을 거예요. 내가 하는 작업들이 그들에게 작은 길을 열어주는 열쇠가 되길 바라요”

지나간 책으로 큰상을 받은 것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한성옥. 그가 최근 공들이고 있는 작업은 4월께 출간 예정인 양성평등의식으로 쓰고 그린, 아이를 위한 요리책과 국내출판사가 세계에서 처음으로 발간할 예정인 파울로 코엘료의 구전설화집을 그림책으로 만드는 일이다.

한정림 기자u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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