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이애드의 다섯 번째 파도’ 포스터 이미지. ⓒ넷플릭스
영화 ‘나이애드의 다섯 번째 파도’ 포스터 이미지. ⓒ넷플릭스

여성으로 태어난 게 아니라 여성으로 길러졌음을 자각할 때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이 사회가, 혹은 나 자신이 정한 상한선에 가로막히는 걸 느끼는 순간이다. 슬프게도 많은 여성이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좀처럼 믿지 못한다. 어떤 면에서는 상한선에 막히는 일이 편안하게 느껴질 정도로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꺾고 주저앉히려는 억압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다.

운동에서도 여성에게만 작용하는 상한선이 존재한다. ‘근육을 키우더라도 남자처럼 되지 말라’, ‘날씬한 몸을 유지하되 너무 마르지 마라’, ‘적당히 경쟁해야지 항상 이기려고 하지 마라’ 등등. 40세가 넘으면서는 나이에 관한 억압까지 새롭게 추가됐다. 예를 들면 ‘관절은 소모품이니까 아껴 쓰라’ 같은. 일일이 응수하기에 성가시고 소모적이어서 상황을 모면할 때가 많았다. 그러다가 문득 화가 났다. ‘내 몸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웬 참견이 이렇게 많은가?’, ‘과연 내가 남자였어도 이런 말을 들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떠나지 않았다.

여성의 결정권에 한해서, 남성의 그것보다 쉽게 말을 얹고 참견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무지하고 무례한 사람이 적지 않다. 왕년에 올림픽 메달리스트를 꿈꾸던 여성이 60세의 나이에 쿠바 하바나에서 플로리다 키웨스트까지 수영으로 횡단하겠다고 선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이 생각은 안 해?”, “다시 생각해봐.”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은 물론 절친조차 그의 결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같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비범한 여성의 도전 의식을 꺾으려고만 한다. 영화 ‘나이애드의 다섯 번째 파도’의 주인공이자 올해로 75세가 된 미국의 수영선수 다이애나 나이애드의 이야기다. 그는 만류하는 이들을 향해 말한다. “세상이 정해주는 한계 따위 안 믿어.”

영화 ‘나이애드의 다섯 번째 파도’ 포스터 이미지. ⓒ넷플릭스
영화 ‘나이애드의 다섯 번째 파도’ 포스터 이미지. ⓒ넷플릭스

나이애드는 28세에 쿠바-플로리다 횡단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전적이 있었다. 그래, 60세면 어떻고 70세면 어떤가, 멋지게 성공에서 그를 주저앉히려던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한 방 먹이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러나 이런 나조차도 한 편의 영웅 서사를 편안하게 따라가지 못했다. 일단 나이애드의 도전이 너무 처절했다. 160km를 60시간 동안 헤엄치는 죽음의 레이스에는 극심한 어깨 통증, 저체온증, 상어, 독해파리, 태풍, 환각 등의 훼방꾼이 득실거린다. 복병에 발목이 잡혀서 실패를 거듭하는 주인공을 지켜보기 괴로웠다. 도전도 좋지만 자학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심 그가 멈춰주길 바랐다. 그럴 리 없지만 주인공이 죽으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건 핑계다. 절대로 꺾이지 않는 의지가 남성이 아니라 여성, 그것도 노인 여성을 통해서 발현되는 게 낯설었다.

영화는 노인이 된 주인공이 왜 젊어서도 실패했던 과업에 다시 도전하는지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나이애드 본인은 ‘깊은 감정과 관련된 복잡한 문제’라고만 짤막하게 언급했다. 명확하고 구체적인 이유는 끝내 드러나지 않았다. 줄곧 ‘왜?’라는 의문을 버리지 못하던 나는 어느 순간 모든 의문을 거두었다. 왜냐니, 왜는 부질없다. 누구나 인생에서 한 번은 자신을 극한까지 밀어붙여야 할 때가 있다. 그 순간 자신을 믿고 도전을 감행할 수 있는 기회가 여성에게는 쉽게 허락되지 않을 뿐이다.

어렵게 기회를 잡은 나이애드는 오직 성공이라는 목표에만 사로잡힌다. 그는 무모하고 이기적이고 배려심이라곤 없는 인물로 변해간다. 결국 팀원이 모두 떠나고 그의 외로운 도전은 다시 한번 위기를 맞는다. 그때 그의 손을 잡아준 이가 삼십년지기 절친인 보니였다. 한 여성의 처절한 도전이 여성 집단의 도전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이제부터 무슨 일을 시작하기에 늦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다이애나 나이애드를 떠올릴 것 같다. 험난한 멕시코 만류에 맞서서 맨몸으로 177km를 쉬지 않고 헤엄쳤던 64세 여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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