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조사위, 발포 책임자 못밝혀..."내가 북한군, 당사자 거짓"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금남로에 모인 시민들 ⓒ5.18 기념재단 제공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금남로에 모인 시민들 ⓒ5.18 기념재단 제공

  5·18 민주화운동 기간 사망 166명, 행방불명 179명, 부상 2617명 등의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다는 정부 차원의 조사 결과가 나왔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지난 4년간의 활동 결과를 모두 담은 개별 보고서를 공개했다.

조사위는 1980년 5월 당시의 모든 사망 사건을 166건의 개별 사건으로 하나하나 분석해 국가 책임을 인정했다. 조사위는 1980년 5월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들의 민간인 집단 학살 사건 5건이 모두 규명됐다고 밝혔다.

조사위는 당시 출동한 병사와 지휘관 등 2만404명 중 2867명을 조사했다. 일반 병사부터 지휘관으로 올라가는 상향식 조사 방식을 활용했다.

조사위는 이를 통해 계엄군 총격은 최소 50곳 이상의 장소에서 이뤄졌으며 사망자 166명 가운데 80%에 달하는 134명이 총상으로 숨졌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2600여명의 부상자 중 약 20%도 총상으로 조사됐다.

개별 보고서에 따르면 계엄군은 헬기 사격, 성폭행 등 여성 인권 유린 등을 저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주남마을에서는 11공수여단이 민간인을 총격해 21명이 사망했다. 이 중 마이크로버스 총격으로 사망한 13명의 사망자 중 일부는 확인 사살까지 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광주변전소에서는 11경비대대에 의한 인명 피해(4명 사망·2명 부상)가 있었으며, 보안시설인 광주교도소에서는 3공수여단과 향토사단인 31사단이 민간인에게 총격을 가했다. 또 광주 송암동, 전남 해남군·나주시 등에서도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다.

조사위는 5·18 관련 작전에 참여한 군과 시위 진압에 투입된 경찰의 사망·상해에 관한 피해 사례도 조사했다. 총 173건을 조사해 이준 43명을 ’진상규명‘ 결정했지만 130건은 규명에 실패해 ’불능‘ 처리했다.

5.18 당시 피해자들 ⓒ5.18 기념재단 제공
5.18 당시 피해자들 ⓒ5.18 기념재단 제공

헬기 사격도 사실로 드러났다. 1980년 5월 21일 광주천 사직공원 일대에서는 500MD 헬기의 사격이 있었다는 것도 조사위가 구체적인 진술과 정황을 확보해 규명했다. 

조사위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을 통해서는 엿새 뒤인 27일 광주 전일빌딩 일대에서 벌어진 진압 작전 중 UH-1H 헬기에 장착된 기관총 또는 탑승 병력에 의한 소화기 사격이 사실이라고 밝혔다.

조사위는 총 20명의 성폭력 생존 피해자의 진술조서를 확보했다. 대인 조사를 통해 ‘여자들의 상의를 탈의시키라’, ‘죽지 않을 정도로 폭행하라’는 상부 지시를 확인했다. 실제로 대검으로 옷을 찢어 벗긴 사실도 드러났다.

핵심 쟁점인 발포 책임자와 암매장 등은 밝혀내지 못했다.

조사위 실무진은 고 전두환 전 대통령의 책임을 인정할 수 있다고 결론 냈지만 전원위원회는 그에 대한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조사위는 "전두환이 광주에 출동한 하나회 소속 장교들과 직접 소통했다"라거나 "전두환 허락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발포는 문서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사실상 전두환의 지시라고 봐야 한다"는 등의 증언을 확보했다.

또 전씨가 항쟁이 한창이던 5월 24일 언론사 편집부장 간담회에서 “무기 반납을 이틀 정도 더 기다렸다가 무산되면 필요한 조처를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는데 실제 이틀 뒤인 26일 계엄군은 5·18 최후 진압 작전(재진입 작전)을 개시하고 다음 날 새벽 작전을 실행한 것을 근거로 들었다.

그러나 전원위원회는 이 같은 실무진 조사에 대해 ‘부실 조사’, ‘검증 부재’ 등을 이유로 인정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조사위는 암매장 추정지로 제보된 현장 21곳을 조사해 9구의 무연고 유골을 발굴했지만, 유전자 검사 결과 5·18 행방불명자와 일치하는 경우는 없던 것으로 나타났다. 또 옛 광주교도소 공동묘지에서 우연히 발굴된 유해 262구 역시 5·18 연관성이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조사위는 암매장된 다수의 시체가 다른 장소로 옮겨졌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에 따라 앞으로 지속적인 조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나타냈다. 

당시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주장에 대한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본인이 5·18 당시 북한에서 직접 광주로 침투했다고 주장한 탈북자 역시 “과거 발언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확인됐다.

 5·18 당시 광주에 직접 침투했다고 주장해 온 특수부대 출신 탈북자 정모씨는 위원회의 조사에서 “과거 발언은 사실이 아니고 북한군 침투설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정씨는 해당 소설은 명백한 논픽션이며 5·18 민주화운동 당시에는 자신은 북한에 있었다고 진술했다.

조사위는 또 다른 탈북자 최모씨를 조사했다. 최씨는 과거 1990년대 언론에 “5·18 당시 북한이 정찰조 3개조를 남파했다”고 주장했다. 최씨는 ‘과거 자신의 발언은 기자들의 질문에 우쭐해 북한군이 침투해 조종했다는 취지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개입설을 주장했던 김모씨 역시 “과거 같이 근무하던 하급자로부터 ‘광주에 400명 정도가 침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구체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한 대부분의 인사들은 어디서 듣거나 인터넷에서 본 내용을 근거로 자신들의 주장의 정당성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위원회는 “일부 탈북자들이 제기하고 있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북한 특수군 광주일원 침투 주장은 조사 결과 상당 부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거나, 역사적·전술적인 타당성을 결여한 무리한 주장인 것으로 파악됐다”고 설명했다.

진상 규명에 성공한 43건 중에서는 피해자 가족 및 유가족의 2차 피해 발생 사실도 확인했다. 조사위는 5·18 관련 군·경 피해자들에 추가 피해조사를 실시해 실시해 국가 차원의 사과와 보상대책을 촉구했다.

조사위는 지난해 12월 26일 공식 조사 활동을 마무리했다. 2019년 12월 27일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에 따라 조사위가 출범한 지 4년 만이다.

조사위는 이달 31일까지 의견 수렴을 거친 뒤 대국민 권고 사항이 담긴 최종보고서를 대통령과 국회에 보고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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