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더하는 말풍선]

*이 글은 작품의 줄거리와 결말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어? 세상의 불의나 부정의에 대항하려 할 때 우리의 발목을 잡는 질문은 종종 자격에 대한 것이다. 고기를 먹으면서 동물권을 논할 자격이 있는가. 비장애인의 특권을 누리면서 장애학을 공부해도 되는가. 이성애자인데 퀴어에 대해 이야기할 자격이 있는가. 한 명의 경험은 얼마나 많은 사람의 경험을 대변할 수 있는가. 세상에 불만을 품고 세상을 바꿀 자격은 어디에서 오는가.

사이사 작가 웹툰 ‘도롱이’.  ⓒ네이버웹툰
사이사 작가 웹툰 ‘도롱이’. ⓒ네이버웹툰

사이사 작가의 동양풍 판타지 웹툰 ‘도롱이’는 자격에 대한 이야기다. 작품은 천 년을 수행한 이무기는 용으로 승천하여 인간 세상을 돌본다는 전통적인 설정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대대로 이무기를 사육하고 도축하여 부를 쌓은 이무기 백정 가문이 생긴 이래, 이무기는 물론 용 역시 거의 멸종한 상태다. 주인공 권삼복과 권삼오는 바로 이 가문의 딸과 아들로 태어나 당연하게 가업을 이어갈 운명이었다. 살아남은 자연산 이무기인 ‘도롱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이사 작가 웹툰 ‘도롱이’.  ⓒ네이버웹툰
사이사 작가 웹툰 ‘도롱이’. ⓒ네이버웹툰

삼복과 삼오가 직면하는 것은 이무기 백정 가문이라는 인간 가해자와 이무기라는 비인간 피해자 사이의 좁혀질 수 없는 거리이자 상흔이다. 고통을 느끼고 말을 할 수 있는 이무기를 도륙하는 일이 선보다 악에 가깝다는 것은 아이들에게도 당연한 진실이다. 하지만 남매가 피로 얼룩진 진실에 대답하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공감 능력은 부족해도 한 번 잘못을 인식하면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 삼복과 달리, 여동생보다도 먼저 이무기 사육의 비윤리성을 고민했던 삼오는 가문의 장남이라는 책임감을 이유로 현상 유지를 선택한다.

성장한 삼복은 이무기 도축은 계속 하되 새끼들은 보호하고 자연산을 잡기 위한 덫을 없애는 등 우리로 치면 ‘동물 복지 농장’을 만들려는 것처럼 보인다. 남매의 대립은 언뜻 옳은 선택을 한 삼복과 위선적인 삼오의 갈등으로 읽힌다. 하지만 삼복이 자주 놓치는 사실을 삼오는 분명히 인식한다. 그들 남매의 존재 자체가 이미 이무기의 피로 얻은 부유함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남매는 그 어떤 인물들보다도 이무기의 생에 대해 논할 자격이 없다. 삼복이 아무리 반성하고 노력해도, 피해자인 이무기의 관점에선 그녀 역시 위선자일 수밖에 없다.

사이사 작가 웹툰 ‘도롱이’.  ⓒ네이버웹툰
사이사 작가 웹툰 ‘도롱이’. ⓒ네이버웹툰

여기서, 삼복에게 자격에 대한 뼈 아픈 질문을 던지는 것이 다름 아닌 이무기 당사자들이라는 사실이 중요해진다. ‘도롱이’의 중요한 가치이자 특이점은 피해자인 이무기들의 목소리를 연약하고 슬픈 수동적인 목소리가 아니라, 천 년 가까이 산 초월적 존재들의 위엄과 연륜을 담은 언어로 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롱이를 용으로 승천시키고 이무기 사육을 천천히 그만두면 모든 것이 잘될 거라 생각하는 삼복의 낙천성에 도롱이는 지속해서 제약을 건다. 아무리 용서를 구해도 완전히 씻기지 않을 인간의 죄를 꿰뚫어 보는 그는 때로는 냉소로 때로는 직언으로 삼복을 대한다.

도롱이의 목소리는 피해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을 가감 없이 재현하면서도 복수가 아닌 상생의 길을 찾기에 초월적이다. 또한 그는 자신에게 인간을 용서할 자격이 있는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동족이 죽어갈 때 홀로 생존한 자신이 얼마나 떳떳할 수 있는지 질문한다. 하지만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부조리를 고치기 위해 십 년 가까이 고군분투하는 삼복을 보며 도롱이 역시 희망을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를 더 중요시하게 된다. 자격이 아닌 의지가 인물들을, 작품을 움직이는 동력이 된다.

사이사 작가 웹툰 ‘도롱이’.  ⓒ네이버웹툰
사이사 작가 웹툰 ‘도롱이’. ⓒ네이버웹툰
사이사 작가 웹툰 ‘도롱이’. ⓒ네이버웹툰
사이사 작가 웹툰 ‘도롱이’. ⓒ네이버웹툰

이무기를 대량으로 죽임으로써 비를 담당하는 용이 사라지게 되고 기근과 악재가 찾아오는 수순이 공장식 축산이 지구 환경을 오염시키는 과정과 닮았다는 것은 현대 독자들에게 너무나 자명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세상에 갚지 못할 빚을 지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삶을 부정하고 자책하면서만 살아갈 수도 없다. 위선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악의 순환을 끊겠다며 발악하는 삼복과 도롱이를 보며, 독자 역시 조금 다른 질문을 할 수 있게 된다: 자격 미달인 채로도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싸울 수 있지 않을까?

용이 될 자격, 용서받을 자격, 살아 있을 자격. 그런 자격은 어디에서 오고, 누가 승인하는가? 어쩌면 우리는 자격이 아닌 의지를 찾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어떤 사죄도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용서를 구하고 싶다는 의지가 있는지, 사는 것 자체가 공해라고 느껴질지라도 조금 더 살아서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열망이 있는지가 실은 우리에게 필요한 유일한 자격일지도 모른다.

청룡의 해를 시작하며 ‘도롱이’를 생각한다. 자격에 대한 이야기를 의지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수 있을 때 비로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오늘도 더 나은 내일을 위해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찾는다. 그럴 자격은 없지만, 더 나은 세상을 원하기에.

사이사 작가 웹툰 ‘도롱이’. ⓒ네이버웹툰
사이사 작가 웹툰 ‘도롱이’. ⓒ네이버웹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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