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이영주 이화학당 법인이사
이화여대 캠퍼스 건립 10억 쾌척
“기부할 돈부터 정해놓고 생활비 맞춰”

이영주 이화학당 법인이사는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며 “제 작은 기부가 더 많은 기부로 이어지는 밑거름이 되길 바란다”고 소망한다. ⓒ송은지 사진작가·여성신문
이영주 이화학당 법인이사는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며 “제 작은 기부가 더 많은 기부로 이어지는 밑거름이 되길 바란다”고 소망한다. ⓒ송은지 사진작가·여성신문

초등학교 6학년, 영천고개라 불리던 ‘달동네’로 이사했다. 정확히 말하면 갈 곳은 그곳뿐이었다. 기술자였던 아버지가 만들었던 자동차도, 친구들이 부러워한 예쁜 원피스도 남의 것이 됐다. 달이 잘 보이던 산동네에서 내려다보면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저렇게 집이 많은데 우리집은 없다”는 생각을 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물지게를 지고 비탈길을 오르내렸다. 물이 넘칠까봐 지게끈을 고쳐 매던 아이는 다짐했다. “여자도 경제력이 있어야 한다”고. 이영주 이화학당 법인이사의 어린 시절 이야기다. 경제력을 갖길 원했던 그는 의사로서 그 바람을 이룬 것을 넘어 후배와 주위 이웃들을 위해 나누는 ‘기부천사’가 됐다.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는 그는 “제 작은 기부가 더 많은 기부로 이어지는 밑거름이 되길 바란다”고 소망한다.

물지게로 물 길어나르며 다짐
“여자도 경제력 있어야 한다”

이 이사는 풍족한 집안에서 나고 자랐다. 아버지는 영화 ‘자유부인’에 투자해 큰돈을 벌었다. 곧바로 투자한 네 편의 영화에도 관객이 몰렸지만, 그 때뿐이었다. ‘대박’을 노리고 잇따라 투자한 영화는 ‘쪽박’을 찼다. 가세는 한 순간에 기울었다. 주위 사람들의 태도도 변했다. 늘 두 손 넘치게 나눠주던 고사떡은 반의반으로 양이 줄었다. 목 빠지게 기다릴 세 동생들 볼 낯이 없었다. 얼굴이 달아오른 어린 이 이사는 “얼른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공부를 곧잘 해 전교 1, 2등을 놓치지 않던 그는 자연스레 약대와 의대를 지망했다.

“풍족하게 살다가 하루아침에 달동네로 이사를 가면서 ‘없이 사는 삶’을 잘 알게 됐어요. 학교 등록금을 제때 못 내 교무실로 불려가서 한소리를 들어야 했고, 물지게도 졌지요. 자연스럽게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죠. ‘여자도 경제력이 있어야 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고요. 4남매 중 맏딸이라 집안을 짊어져야 한다는 책임감을 더 무겁게 가졌어요.” 

자신의 기부금으로 조성된 이대서울병원 ‘이영주홀’에 선 이영주 이화학당 법인이사. ⓒ송은지 사진작가·여성신문
자신의 기부금으로 조성된 이대서울병원 ‘이영주홀’에 선 이영주 이화학당 법인이사. ⓒ송은지 사진작가·여성신문

텃세에 ‘여의사’ 성차별까지 
포기 않고 견디며 꿈 이뤄

그는 바람대로 의사의 꿈을 이뤘다. 1966년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한 그는 졸업 후 이화여대, 연세대, 아주대 의대 등에서 교수로 일했다. “가장 기뻤던 순간은 국가고시에 합격했을 때”라고 할 만큼 그는 일을 사랑했다. 그의 전문진료 분야는 중환자의학, 약물대사로 미국 콜롬비아대학교에서 약물대사에 관해, 미국 피츠버그 병원에서는 중환자관리에 관해 연수를 하며 습득한 기술을 학교로 돌아와 적용하며 전문성을 갈고 닦았다. 중환자학회 회장, 호흡부전연구회 회장 등을 거치며 중환자 전문 의료인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그도 ‘여의사’로 불리며, 실력이 아닌 ‘성별’ 때문에 밀려야 했던 순간이 있었다.

“한 번은 동료 남자의사들과 식사를 하는 자리였어요. 남자들끼리 동문 행사 얘기를 나누다가 ‘여자도 동문이냐’면서 웃더라고요. 저는 다른 학교 출신이었지만, 저도 ‘여자’였기에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하지만 그들은 그 자리에 있던 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어요. 그들의 말에 저도 ‘무례하다’고 정색하고 화를 내지 못했고요. 당시 차별은 공공연하게 이뤄졌어요. 일부 남자의사들은 ‘여의사를 안 쓰는 10가지 이유’라는 말을 만들어내서 여기저기 퍼뜨렸어요. 여자 의사는 아이 때문에, 남편 때문에,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일을 안하려든다는 거예요. 사실 전날 진탕 술 마시고 다음날 결근하는 의사들은 남자의사들이 많았는데도 말이죠. 교수 임용 과정에서도 성차별을 느꼈어요. 전임강사 4년을 넘긴 자가 조교수로 승진하지 못하면 학교를 떠나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어요. 그런데 ‘잘리는’ 의사 대부분이 여성인 거예요. 대놓고 성별 때문에 승진에서 누락됐다고 하진 않지만 결과가 그걸 보여줬어요.”

차별적인 구조 속에서도 그는 살아남았다. 경제력을 위해 의사를 택했지만 막상 현장에선 생명을 살린다는 것에 더 큰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그 연장선에서 뇌사자 발굴부터 장기이식까지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며 장기기증의 중요성을 알리는 일에도 앞장섰다. 장기기증운동은 퇴임한 지금도 애정을 갖는 분야다. 이 이사는 “뇌사자 장기기증은 생명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자, 가장 귀한 생명 나눔이라고 할 수 있다”며 장기기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대서울병원 지하 2층에 조성된 이영주홀.  ⓒ송은지 사진작가·여성신문
이대서울병원 지하 2층에 조성된 이영주홀.  ⓒ송은지 사진작가·여성신문

“옳은 일이라고 판단하면 
절대 마음이 꺾이지 않는다”

의사로서 실력으로도 인정받은 그였지만 돈 버는 일보다는 ‘쓰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그에게 ‘쓰는 일’이란 ‘나눔’이었다. 후원 요청을 받으면 마다하지 않고 적은 돈이라도 보냈다. 정년퇴임을 할 때에는 정기 기부처가 20곳이 넘었다. “‘없이 사는 삶’을 살아보니 그 서러움을 잘 알죠. 주변의 작은 도움이 얼마나 위로가 되고 필요한 일인지 몰라요. 그래서 후원 해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특히 중환자실에서 자녀를 잃은 환자 보호자가 오히려 다른 이들을 위해 써달라며 돈을 기부했을 때가 가슴에 많이 남았어요. 나도 작은 힘이라도 보태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계기예요.”

이 이사는 지난 2013년 ‘뿌리’인 이화로 돌아왔다. 스스로를 “영원한 이화인”으로 소개하는 그는 병원 건립기금부터 중환자실 시스템 구축과 인재 양성을 위해 기부를 이어갔다. 그는 배우자인 하창화 ㈜한국백신 회장과 함께 이화여대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이화의료원에도 고액을 기부했다. “외조를 적극적으로 해준 남편에게 늘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또 20억원을 기부해 이대서울병원 내 ‘이영주홀’을 조성한 바 있다. 월급 전액을 털어 중환자 세부전문의의 길을 가는 후배 연수 기금으로도 지원했다.

“월급을 전액 기부했을 때는 금전적 아쉬움은 있지만 보람이 더 컸어요. 이전에도 급여가 들어오면 정기 기부처에 보낼 금액부터 정리하고 나머지 돈으로 살림을 했어요. 그게 마음이 편했어요. 기부는 필요한 돈을 쓰고 남은 돈으로 하라는 얘기도 들었지만, 그러면 제대로 기부할 수가 없어요.”

최근 이 이사는 ‘이화 웨스트 캠퍼스 건립기금’에 10억원을 쾌척했다. 이번 기부금은 이화여대 캠퍼스 서쪽 후문 지역에 글로벌 융합연구 및 산학협력 지구를 구축하는 사업 등에 쓰일 예정이다. 이 이사는 “의과대학을 졸업한 선배로서, 영원한 ‘이화인’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이번에도 후배들을 위해 학습·연구 공간을 마련할 수 있어 기쁘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기부가 모교 발전과 나눔 확대를 위한 밀알이 되길 바랐다. “의과대학 뿐 아니라 이화의 여러 선배 동창들의 따뜻한 관심이 기부로 이어져 새로운 캠퍼스를 이화의 모든 세대가 함께 꿈꾸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의 기부가 다른 기부를 만드는 밑거름이 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 이사는 은퇴 후에는 조경사 자격증, 농식품가공학과 수료증을 취득하고 지금은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위한 공부를 하며 끊임없이 공부하고 있다. 앞으로도 사회복지와 여성들의 발전을 위해서 미력하나마 기여하고 싶다는 바람도 전했다.

청계천 신평화시장에서 산 3만원짜리 구두와 시누이가 선물한 20년 된 브로치를 달고 “옳은 일이라고 판단하면 절대 마음이 꺾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값을 매길 수 없는 편안함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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