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나라를 되찾은 지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여성신문은 남성 중심적인 시각으로 쓰인 역사 교과서에선 보기 힘든 여성들의 항일 독립운동사를 연재한다. 필자 박용옥(70)씨는 2001년까지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성신여대 여성연구소장, 한국여성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여성근대화의 역사적 맥락'(2001년, 지식산업사), '한국여성항일운동사연구'(96년, 지식산업사),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2003년, 홍성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편집자 주>

국권 박탈 을사조약 체결에 순절, 의병운동 잇달아

“나라 일 그르치고 무슨 면목으로 내실에 드시오” 참정대신 꾸짖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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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 열강들의 엄호를 받아 노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포츠머스조약 체결 뒤 곧바로 한국 침략을 서두를 새 조약 체결을 위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서울에 파견했다.

이토는 1905년 11월 10일 오전 7시 경부선으로 서울에 도착하여 손탁호텔에 짐을 풀고 이튿날 고종황제를 알현, 을사조약 체결을 강박했다. 이 조약의 중요 내용은 외교권 박탈과 일본 통감이 시정하는 것이었다. 황제는 물론 강력히 반대했다. 그러자 이토는 일 주일에 걸쳐 참정대신 한규설을 비롯하여 5부의 대신들을 협박, 회유하여 참정대신을 제외한 을사오적(乙巳五賊)을 매수했다.

같은 달 17일 이토는 궁궐 안팎과 시내 요소 요소에 군대를 배치해 놓고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공사와 헌병을 거느린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대장과 입궐하여 오후 2시부터 조약 체결 성립을 밀어붙였다. 무력의 공포 분위기에서 조약 체결 협의회를 열어 대신들의 '가'와 '부'로 결정케 한 결과 참정대신만 '부(否)'를 썼다.

당시 한 신문은 이 조약을 결코 인허하지 않기로 한 황제가 '용루(龍淚)를 흘리시고 종사생령(宗社生靈)을 위하여 상천에 기도하셨다'는 가슴 아픈 보도를 했다.

을사조약 강제 체결 소식이 온 나라에 퍼지자 반대 저항운동이 사회 각층에서 다양하게 일어났다. 황성신문은 같은 달 20일자 사설 '이날에 목놓아 통곡한다(是日也放聲大哭)'에서 '개 돼지만도 못한 5적은 말할 것도 못되나 한 나라를 대표하는 참정대신이 역사의 책임을 모면하려고 '부'를 던졌는가. 어째서 병자호란 때의 충신들처럼 조약문서를 찢어버리지도 못하고 할복자살도 못하였는가'라고 꾸짖었다. 조약 체결에 통분하여 민영환처럼 순절한 이들이 연하였고 마침내 적극적 항일국권회복을 위한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부인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참정대신의 부인은 대감이 나라 일을 그르치면 그 자리에서 자결할 것이라고 굳게 믿어 자신도 소복을 하고 뒤따라 죽고자 약봉지를 들고 밤새 기다렸다. 새벽녘 참정대신이 무사 귀가하여 통곡을 하면서 안채로 들어오자 “나라 일을 그르치고 무슨 면목으로 내실에 드시오” 라고 꾸짖고는 식음을 전폐했다.

군부 협판 이한영의 부인도 통곡하며 내실로 들어오는 부군을 향하여 “무슨 일을 하려고 죽지 못하였소. 그 칼은 어디에 쓰려고 차고 다니시오”라고 꾸짖고 단식을 했다. 이런 부인들이 적지 않았다.

군부대신 이근택은 귀가하여 처자에게 내가 '가'를 썼으니 내 권력 부귀가 변함이 없게 되었다고 자랑했다. 부엌에서 이 말을 들은 찬비(饌婢)가 “이 놈이 이처럼 흉역한 줄을 모르고 여러 해 동안 노역살이 한 치욕을 씻을 수 없구나”라고 소리치며 식칼로 도마를 내리치고는 그 집을 뛰쳐나와 버렸다.

내부대신 이지용이 기생 산홍을 첩으로 삼고자 하자 “세상에서 대감을 5적의 우두머리라고 하는데 내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소”하고 거절했다.

철없는 술꾼들이 나라 걱정도 없이 술을 사 마시러 오자 주파(酒婆)가 “너희 같은 불충한 놈들에게는 술이 아무리 많아도 팔 수가 없다”고 일갈하여 내쫓았다. 부녀들의 이 같은 고결한 구국 충절은 어떤 역경에서도 항일독립운동을 멈추지 않고 광복을 맞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박용옥/ 사학자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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