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하루가 시작되어도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날들이 있다. 어둠이 밀려오고, 아무도 날 이해하지 않는다. 세상은 귀머거리 기계. 마음도 머리도 없는 기계. 그런 날이면 나는 짐을 꾸려 천불천탑(千佛千塔)이 있는 곳, 운주사를 찾는다.

“노비들은 협곡 속에 숨어살면서 미륵님의 계시를 들었다. 이 골짜기 안에 천불천탑을 하룻밤 사이에 세우면 수도가 이곳으로 옮겨온다는 것이었다. 도읍지가 바뀌는 새로운 세상, 그들이 나라의 중심이 되는 세상이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 황석영 '장길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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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워있는 부처. 조각이 끝난 뒤 세우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미완성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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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불천탑의 전설이 깃든 운주사.

그 날 나는 운주사 골짜기를 홀로 걷고 있었다. 마음속에선 쉼 없이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내 안의 낯선 나들이 뱉어대는 소리 없는 말들은 소나무 숲 여기저기를 강아지처럼 부석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 이 갑갑하고 어수선한 머리와 가슴을 텅 비워 편히 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건 별로 어렵지 않아”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아이 하나가 날 보며 방긋 웃고 있었다. 아이는 아무 말 없이 자기를 따르라고 손짓하고는 소나무 사이로 난 샛길로 사라졌다.

경배를 강요하지 않는 불상

계곡을 지나고 바위산을 넘어 한참을 따라간 걸까? 저만치서 천상의 강물처럼 흐르던 짙은 안개를 헤치고 기기묘묘한 석상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동글동글한 바구니를 포개놓은 듯한 불탑들과 조악하게 조탁되어 바보스럽게 느껴지는 돌부처들, 그리고 산 언덕바지에 누워 있는 거대한 바위 덩이에 새겨진 부부 와불.

처음 만난 천불천탑은 불가사의 그 자체였다. 불탑들이 그러했고 돌부처들이 또한 그러했다. 그럼에도 이 희대의 불가사의가 하나같이 즐겁고 편안하게 느껴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위엄을 갖추고 있지도 않았고 의젓하지도 않았고 깨끗하지도 않았다. 그들 앞에 설 때 옷매무시를 바로 할 필요도 없었고 숙연한 표정을 연출할 필요도 없었고 경배를 강요당하는 짓눌림 따위도 없었다. 그냥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느끼면 됐던 것이다.

민중에 깃든 슬픈 전설

운주사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에 천불천탑 이야기가 나오면서부터.

“노비들은 황토뿐인 야산에서 바위를 찾으려고 산등성이를 넘어가고 들판을 달리고 강을 건넜다. 바위를 굴려오고 끌어오고 떠메고 오면서 그들은 북을 두드렸다. 집채 만한 북을 골짜기 어구에 걸어 두고 산천이 떠나가라고 두드리면서 미륵상과 탑을 쪼아 세우는 노고를 온 세상에 알렸다. 세상의 모든 천민이여 모여라. 모여서 천불천탑을 세우자”

- 황석영 '장길산' 중에서

황석영은 운주사를 미륵사상의 결과로 파악한다. 소설 속에서 노비들은 미륵과 함께 도래할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불탑과 돌부처에 심혈을 기울인다. 그러나 그 개벽 세상은 미완의 실패로 끝난다. 다음 날 새벽닭이 울기 전에 천 개의 불탑과 돌부처를 세우면 개벽 세상이 온다 믿고 밤새 일을 했지만, 마지막 한 개를 미처 일으켜 세우지 못한 채 날이 밝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한 것. 천불천탑은 그렇게 민중의 마음속에 깃든 서글픈 전설로 남고 만다.

내 앞에 선 그대는 누구냐?

이 땅에 있어서 개벽 세상은 늘 미완의 실패로 끝나게 마련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핍박 받는 민중은 항상 개벽 세상이 오기를 기대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손수 망치와 끌을 가지고 와서 서툰 솜씨로 불상을 만들었을 것이다. 불상을 만드는 자가 어찌 부처님의 신성을 모독할 생각을 하겠는가. 성심성의껏 조탁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허나 이제 와서 보면 그들이 조각한 것은 불상이 아니다. 당시의 무지렁이들은 극락세상에 머무를 자신과 가족의 미래를 조각했던 것이다. 그것이 운주사 불상들이 하나같이 못생긴 이유다. 그들은 천불천탑을 통해 자기 안의 부처님을 바깥 세상에 드러내 놓았다. 어쩌면 그 일 자체가 하나의 축제이기도 했으리라. “자신이 곧 부처이고 부처가 곧 자신이다”

골짜기 가장 깊숙한 곳에서 마주한 미륵불이 말을 건네 온다. 본성은 말을 떠나 있고, 입을 열면 그르치는 것. 말을 빌리지 말고 일러라. 내 앞에 선 그대는 누구냐?

글/권경률 여행칼럼니스트

사진/화순군청 문화관광과

가볼만한 곳

●낙안읍성/낙안온천:운주사가 자리잡고 있는 화순군에는 또 하나의 명물이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인돌군이 그것이다. 화순의 고인돌군은 도곡면 효산리와 춘양면 대신리를 잇는 고개의 양 계곡 일대에 펼쳐져 있다.

화순온천은 인체에 필요한 다섯 가지 미네랄이 풍부한 중탄산나트륨 온천이다. 태고의 화산 분화구에서 뿜어내는 100% 천연 온천수로 발육촉진, 탈모방지, 피부미용 등에 탁월한 효능이 있음은 물론 신경통, 관절염, 만성신장염을 억제하는 효과도 있다.

●문의:화순온천 관광지 안내소(061-370-5000),

세계유산 화순고인돌 체험학습관 (061-370-1303)

찾아가는 길

●자가용:광주에서 너릿재터널을 지나 화순읍까지(22번 국도) 온 후 화순중앙병원 사거리에서 우회전, 29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능주에서 다시 우회전하면 도곡 효산리를 거쳐 평리사거리에 이른다. 여기서 좌회전해 지방도 817호선을 따라 도암 삼거리까지 곧장 가서 월전마을, 용강저수지를 지나 우회전하면 운주사 주차장이다. 주차장에서 걸어서 5분이면 천불천탑.

●대중교통:버스는 광주 광천터미널에서 218번, 318번 운주사행 버스를 타면 된다. 열차는 새마을호나 무궁화호를 타고 화순역에 내리면 된다.

●문의:운주사(061-374-0660,www.unjusa.org), 광주고속터미널(062-360-8114), 화순역(061-374-7788)

남도 산사체험 프로그램

겨울에 찾는 가을단풍이 든 화려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조용히 나를 돌아볼 수 있고, 세상을 너그러이 볼 수 있는 눈이 생긴다. 전라남도는 2005년 새해를 맞아 겨울 산사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할 예정이다. 눈 쌓인 절집에서 새벽예불을 함께 하며 한해를 설계해 보는 것도 이 시즌만의 풍미라 할 수 있을 터.

●1차 - 1월 8~9일 송광사, 화엄사, 백양사

●2차 - 1월15~16일 미황사, 화엄사, 백련사

●3차 - 1월 22~23일 대흥사, 송광사, 화엄사

●4차 - 1월 29~30일 송광사, 대원사, 백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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