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한 영화 읽기]

영화 ‘나폴레옹’ 스틸. ⓒ소니 픽쳐스 제공
영화 ‘나폴레옹’ 스틸. ⓒ소니 픽쳐스 제공

세계사에 굵직한 한 획을 긋거나, 자기 몫의 신화 속에서 불멸하는 영웅은 언제나 리들리 스콧의 흥미를 끌었다. ‘킹덤 오브 헤븐’과 ‘글래디에이터’부터 우직한 이야기와 장엄한 비주얼로 ‘새로 쓰인’ 영웅을 각인시킨 그는 항상 철저한 고증을 목표한 역사가보다도 이야기꾼을 자처했다. 그렇기에 영화의 첫 장면부터 마리 앙투아네트와 나폴레옹이 단두대 앞에서 교차하는 ‘허구’가 등장해도 관객은 스콧 식의 은유를 여유로이 소화할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160분짜리 나폴레옹 연대기는 발칙한 상상의 운을 띄우자마자 내내 표류하며 찝찝한 의문만 남긴다.

영화 ‘나폴레옹’ 스틸. ⓒ소니 픽쳐스 제공
영화 ‘나폴레옹’ 스틸. ⓒ소니 픽쳐스 제공

49세인 호아킨 피닉스의 몸을 빌어 우스꽝스럽고 심약한 겁쟁이로 그려진 나폴레옹의 초상은 사실상 배우의 전작인 ‘보 이즈 어프레이드’의 재림 같다. 어떤 이들은 영국 감독이 프랑스 영웅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분노하지만 나폴레옹 사후 200년간 무수히 생산된 ‘판본’들의 오락성을 고려한다면 이 정도 각색이 용서 못 할 금기는 아니다. 익히 알려진 전쟁광이 출정 자체를 두려워하는 낯선 모습은 오히려 의도된 재해석의 묘미를 곱씹게 만든다.

하지만 이번 ‘재해석’은 결국 변죽만 울리고 결론을 짓지 못한다. 코르시카 출신의 꼬리표를 떼기 위해 자원한 툴롱 전투에서 그는 미숙한 군인의 면모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기습 없이 정면돌파하겠다며 비장하게 선언하더니 바로 다음 순간 야습을 준비하는 장면이 나오고, 성을 향해 돌진하려던 순간 포탄에 맞아 즉사한 군마에 깔려 바닥에 나뒹구는 식이다.

그 후 워털루에서 완전히 몰락하기까지의 전쟁사 20년을 급하게 아우르는 동안 나폴레옹은 각기 잔혹한 집행자, 얼떨결에 쿠데타를 일으키는 얼간이 정치인, 불후의 전략가, 병사들을 버리는 비겁자로 묘사된다. 매번 180도 변신하지만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바람에 관객은 이것을 정석적인 영웅의 성장 서사로도, 인간 보편의 취약함에 대한 탐구로도 읽을 수 없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나폴레옹의 50가지 그림자만 남을 뿐이다.

마틴 스코세이지는 ‘플라워 킬링 문’으로 착취적 역사와 기만적 스펙타클을 동시에 고발하고, 제임스 카메론은 아예 무대를 지구 밖으로 옮겨 블록버스터 친환경 에세이를 쓰는 시대다. 관객은 물을 수밖에 없다. 거장 스콧이 고른 이 시대의 이야기는 왜 하필 18-19세기의 통치자 나폴레옹이어야 했는가? 야망에 찬 정치가이자 근대적 법전의 고안자이기도 한 나폴레옹에 대한 색다른 답이 나왔다면 좋았겠지만 영화는 오로지 그의 전쟁, 그리고 그의 여자 조제핀과의 불건강한 관계에만 몰입해 있다.

영화 ‘나폴레옹’ 스틸. ⓒ소니 픽쳐스 제공
영화 ‘나폴레옹’ 스틸. ⓒ소니 픽쳐스 제공

차라리 나폴레옹이라는 ‘상징’을 제대로 활용했다면 어땠을까. 그의 서사를 경유해 남성 영웅 신화 이면의 폭력성과 허구성에 대한 완벽한 스케치를 의도했다면 어땠을까. 차라리 조제핀이 나폴레옹을 절대로 사랑하지 않으면서 안전하고 사치스러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그를 멋대로 조종하는 욕심 많은 인물로 묘사되었다면 어땠을까. 삼류 야사라는 비난을 들었을지는 몰라도, 한편으로는 사반세기전 걸출한 여성영화 ‘델마와 루이스’를 제작했던 비범한 남성 감독의 여전한 재능을 재발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들리 스콧은 완전히 전복적인 다시 쓰기를 하고 싶은 마음도 없으면서 나폴레옹을 전형적으로 유약하고 의존적이고 불안정한 남자아이처럼 묘사해 일종의 연막을 생성한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출정 동안 바람을 피우더니 뻔뻔하게 “당신은 나와 어머니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선고하는 조제핀, 그것을 얼빠진 채 더듬더듬 따라읊는 나폴레옹의 관계가 연상시키는 것은 한 오래된 격언이다.

“세상은 남자가 다스리지만, 그 남자는 여자가 다스린다.”

성경과 탈무드와 소크라테스의 말로부터, 남자들이 지겹도록 염불을 외는 덕에 생존해 온 낡은 사상이 결국 리들리 스콧의 종착점인가 싶어 아득해진다. 이 한 줄이 얼마나 오랫동안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여자들의 손발을 묶고 눈을 가려왔는가. 결국 ‘남자를 가정에서(혹은 침대에서) 잘 다루는 여자는 편히 살 것’이라는, 그러니 거기에 머물며 만족하라는 극강의 여성혐오를 함축하지 않는가.

조제핀이 정말로 영웅의 하나뿐인 마음을 차지한 대단한 '요부'였다면, 왜 황제의 대를 이어줄 남아를 낳지 못한다는 (자기 탓도 아닌) 이유로 내쫓겼는지 영화는 명확히 설명하지 못한다. 기록된 역사가 아닌데 덧붙여진 건 나폴레옹이 울부짖는 조제핀의 뺨을 때려 ‘우리 관계는 국익을 해한다’는 이혼 서약서를 억지로 읽게 만든 장면뿐이다. 혹시 이 또한 ‘근대적’ 법전을 쓰면서 여성인권은 퇴보시킨, ‘여성은 지금도 너무 많이 가졌다’며 운신의 자유를 제한하고 편지를 보내는 것마저 남편 허락을 받게 만든 여성혐오자 영웅의 모순을 조롱하려던 리들리 스콧의 큰 뜻일까.

영화 ‘나폴레옹’ 스틸 ⓒ소니 픽쳐스
영화 ‘나폴레옹’ 스틸 ⓒ소니 픽쳐스

‘나폴레옹’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건 낡고 우스운 사랑의 서사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배우 바네사 커비의 열연이다. 그가 주연 남배우보다 14세나 어리다는 점을 생각하면 다시금 리들리 스콧의 의도가 궁금해지지만(조제핀은 나폴레옹보다 6살 연상이었다), 밑 빠진 독 같은 영화를 그나마 납득 가능하게 만들어준 커비의 서늘한 연기력만은 놀랍고 반갑다.

회사원. 영화 읽고 책 보고 글 쓰는 비건 페미니스트. 브런치: https://brunch.co.kr/@yoohae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