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더하는 말풍선]

*이 글은 작품의 줄거리와 결말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네이버 웹툰 ‘왕년엔 용사님’. ⓒ네이버 웹툰
네이버 웹툰 ‘왕년엔 용사님’. ⓒ네이버 웹툰

2019년 네이버 웹툰 최강자전에 혜성처럼 등장한 ‘왕년엔 용사님’은 웹툰 속 여성 재현의 지평을 획기적으로 넓힌 중요한 작품이다. 희생과 타협을 거듭하며 인생의 풍파를 견뎌온 기혼 중년 여성의 영웅성을 화려하고 역동적인 판타지 액션 장르로 그려낸 이 작품은 여성서사 웹툰계의 새로운 해답처럼 보인다.

하지만 ‘왕년엔 용사님’이 진정 독자들에게 내미는 것은 쉬운 답이 아닌 어려운 질문이다. 어째서 가족 안에서, 사회에서 여성은 자신보다 타인을 우선하는 영웅이 될 것을 강요받는가? 아무도 여성을 영웅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와 모두가 여성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사회는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다. 여성의 영웅성이 부각될수록 그가 포기한 꿈과 감내했던 삶은 지워지는 딜레마가 존재한다. 작품은 그 딜레마를 넘어서기 위한 치열한 고민의 장이다.

네이버 웹툰 ‘왕년엔 용사님’의 한 장면. ⓒ네이버 웹툰
네이버 웹툰 ‘왕년엔 용사님’의 한 장면. ⓒ네이버 웹툰

평범한 고등학생 이명옥은 화재로 부모를 여의고 삼촌 댁에 얹혀살다 운명처럼 이세계로 이동해 마왕을 봉인하는 영웅이 된다. 하지만 반년간의 모험 끝에 돌아온 곳은 어째서인지 7년이 지난 후의 한국. 명옥은 법적으로 사망 처리가 되어 있었고, 삼촌은 명옥의 부모가 남긴 유산을 모두 탕진했다. 자신을 미친 사람 취급하며 차별하는 삼촌 부부를 견디지 못해 가출한 명옥은 안전하게 행복해질 방법으로 결혼을 선택하지만, 남편 역시 곧 사망한다. 이제 49세가 된 명옥은 두 아이를 혼자 키우며 작은 슈퍼를 운영하고 있다. 그렇게 늙어버린 명옥에게 또 한 번 이세계를 구해달라고 부탁하는 옛 동료들은 반가운 얼굴이 아니라 일상을 뒤흔드는 위협이다.

명옥이 겪은 불행에도 불구하고 그를 다시 용사로 만들려는 이세계 동료들의 요구, 핏줄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용서하라는 삼촌의 요구, 준비되지 않는 엄마에게 자꾸만 과거의 이야기를 해달라는 딸의 요구까지. 명옥은 어릴 때도 나이 들어서도 다른 사람들의 행복과 자신의 행복을 저울질하기를 종용당한다. 그가 감당해야 하는 부담은 여성, 특히 중년 여성에게 터무니없을 정도로 모순적인 잣대를 들이미는 우리 사회의 은유처럼 보인다.

네이버 웹툰 ‘왕년엔 용사님’의 한 장면. ⓒ네이버 웹툰
네이버 웹툰 ‘왕년엔 용사님’의 한 장면. ⓒ네이버 웹툰

하지만 세월은 연륜을 준다. 명옥은 자주 분노하고 혼란스러워하지만, 그가 트라우마에 허우적대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자신의 과거를 똑바로 마주하고 괴로웠던 순간과 행복했던 순간을 모두 숙고할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이다. 성장 캐릭터로서의 중년 여성은 독자들이 나이듦을 긍정하고 기대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출산, 노화, 경력 단절은 여성에게 공포다. 하지만 명옥은 자신의 공포보다 강하다. 살아 있는 한 그의 성장은 멈추지 않는다.

네이버 웹툰 ‘왕년엔 용사님’의 한 장면. ⓒ네이버 웹툰
네이버 웹툰 ‘왕년엔 용사님’의 한 장면. ⓒ네이버 웹툰

능력을 발휘하며 운명의 주체로서 살고픈 욕망을 포기하고 평범함을 고집하며 슈퍼를 지키는 명옥의 시간은 누군가의 눈에는 죽은 삶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납작함을 넘어 오만한 판단이다. 명옥은 능력으로 삶의 가치를 매기는 태도에 대항하며, 단 하루도 허투루 살지 않은 자신의 삶을 온 힘을 다해 긍정한다. 가족을 지키고 싶은 마음과 자신의 잠재력을 알고 싶은 열망은 모순되는 가치가 아니다. 그는 엄마인 만큼 용사이고, 용사인 만큼 엄마다. 작품은 종종 양자택일의 관계에 놓이는 가족과 자기발견의 가치가 상충하지 않는 새로운 성장 서사를 모든 연령대의 여성들에게 선사한다.

네이버 웹툰 ‘왕년엔 용사님’의 한 장면. ⓒ네이버 웹툰
네이버 웹툰 ‘왕년엔 용사님’의 한 장면. ⓒ네이버 웹툰
네이버 웹툰 ‘왕년엔 용사님’의 한 장면. ⓒ네이버 웹툰
네이버 웹툰 ‘왕년엔 용사님’의 한 장면. ⓒ네이버 웹툰

멋대로 기대하고는 아무 보상도 주지 않는 사회와 가족에 대한 비판을 성실히 수행하면서도, 작품은 여전히 그들을 위해 싸우는 명옥을 주인공으로 설정한다. 부조리한 세계를 등지고 개인의 행복을 찾는 방법이 있었다면 명옥은 그 길을 선택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계와 개인은 늘 연결되어 있다. 세계를 버리고 개인을 구하는 것은 이기심이고, 개인을 포기한 세계는 비뚤어진 세계일 것이다. 쉬운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에 옳은 미래를 향하는 마음을 가지고 더듬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명옥은 과거와는 다른 의미의 용사로 거듭나는 중이다. 그는 왕년에도 지금도 여전히 용사다.

모든 비극이 너무 첨예하게 얽혀 있어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알 수 없더라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오는 불행에 맞서며 용감하게 늙어가는 것은 사회가 호명하는 역할에 얽매여 스스로를 좀먹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의 양태일지 모른다. 준비할 새도 주지 않고 닥쳐만 오는 세상과 여성에게 여전히 잔인할 내년을 맞이하기 전에, 명옥의 모험에 동행해보는 것은 어떨까. 부당하고 부조리한 사회를 오늘도 살아낸 모든 연령대의 여성들에게 ‘왕년엔 용사님’을 권한다.

작품 링크: https://comic.naver.com/webtoon/list?titleId=755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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