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후 역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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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뜻밖에도 엉뚱한 사랑 이야기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끝으로 더는 새 애니메이션을 만들지 않겠다던 미야자키 하야오가 영국 작가 다이애나 윈존스가 쓴 판타지 소설을 읽고 그 결심을 깨버렸다. 그러니까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다이애나 언니가 꿈꾼 즐거운 노년 판타지인 셈이다. 은발의 하야오는 그 판타지에 선뜻 이끌려 곧 새 작업에 들어갔고, 이렇게 우리에게 익숙한 지브리표 애니메이션을 또 하나 만들어 내놓았다.

지금까지 하야오의 작품들을 놓치지 않고 봐 왔던 이들이라면 크게 새로울 거 없는 종합편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래도 하야오의 유머는 '하울의…'에서 한결 무르익어 있다.

마법이 아직 존재하는 잉거리 나라. 모자 가게에서 일하는 열여덟 살 소피는 황야마녀의 저주로 갑작스레 90세 할머니가 돼 버린다. 낙심 속에서도 마음의 눈높이를 몸에 맞추며 소피가 집을 나와 찾아간 곳이 마법사 하울의 움직이는 성.

소피는 하울을 도우려 어려운 길을 떠나고 하울도 소피를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맞서 싸운다. 사랑은 그렇게 서로를 구원하고 바꿔낸다. 호호 할머니가 된 소피와 꽃미남 마법사 하울의 특별한 사랑 이야기를 하면서 하야오는 여러 나라와 시대를 끌어들인다. 영국의 마법 이야기를 하면서 스위스의 마을과 파리의 궁전, 이탈리아의 바다를 보여준다. 중세풍 옷과 근대의 기차와 전함이 화면을 화려하게 수놓는다. 전화에 휩싸이는 도시와 전투기들도 낯익다. 바로 지금 현대의 모습이다. 하울은 전쟁이 싫다고 되뇐다.

'나이 들어 좋은 건 놀랄 게 없단 거라며, 이는 건강해서 다행'이라고 꿍얼대는 소피. 그런 할머니가 여주인공인 순정만화영화를 본 적이 있던가!

점점 풍부하게 진화해 가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여주인공을 만나는 일은 그래서 기다림조차 즐겁다. 소년이 달려와 구해주길 기다리던 소녀들이 이렇게 자라 처녀로, 어머니로, 할머니로 한 몸을 이루어 소년을, 세상을 구원하러 가고 있음에야.

임어진/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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