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한 영화 읽기]
나와 당신의 공생을 포기하지 않는 영화

영화 ‘괴인’ 스틸. ⓒ영화사 진진
영화 ‘괴인’ 스틸. ⓒ영화사 진진

누군가의 삶은 너무 괴이할 정도로 평범해서 그걸 펼쳐놓기만 해도 최고의 스릴러가 되는 법. ‘괴인’이 선택한 ‘평범함’은 현시점 3040 한국 남성의 평범함이다. 선량하나 무례하고, 서투르나 징그럽고, 귀엽고 싶으나 무지해도 너무 무지한, 늙지도 젊지도 않은 ‘기홍’의 초상.

특정 성 연령을 콕 집어 극도로 건조하게 해부하는 이 영화의 서스펜스는 기홍 주변의 이상한 일이 아니라 기홍을 바라보는 영화 밖 사람들 각자의 상식에서 기원한다. 만인에게 불퉁하고 무례하게 구는 기홍은 관객을 극도로 긴장하게 만들고, 그의 부박함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를 낮추어 보게 만든다.

기홍은 전혀 시적이거나 영화적이지 않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며 딱 해야 할 만큼만 일하는 그에겐 애수도 취향도 고민도 깊이도 없다. 그는 경상도 출신의 무뚝뚝한 장남이고 노가다판의 기싸움을 군대에 비유해 설명하는 흔한 아저씨다. 평생 영특함에 대한 기대를 받아본 적도 없을 것 같다. 피아노 학원의 젊은 여자 원장에게 찍찍 반말을 던지고, 바에서 만난 한참 어린 여자에게 말도 안 되는 추파를 던지는 그는 나와 너무 다른 사람이다. 이 시대의 적절한 예의에 대해 배운 게 없어서, 아주 오래전 업데이트를 멈춰서, 악의 없이도 ‘양식 있는’ 타인을 짜증나게 하는 인간.

기홍은 집주인 정환 ‘형님’의 따사로운 거실을 바깥뜰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객식구이며, 젊은 커플이 애정을 나누는 원룸을 넋 놓고 관음하다 계단에서 미끄러질 뻔한 솔로이기도 하다. 그들과 자신 사이에 뚜렷한 계급의 단차가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느끼며 살아간다.

영화 ‘괴인’ 스틸. ⓒ영화사 진진
영화 ‘괴인’ 스틸. ⓒ영화사 진진

그러나 그는 의외로 최근 유행처럼 번진 ‘억울함’의 정서나 열등감에 크게 좌우되지 않는 듯하다. 더 약하고 가진 것 없는 어린 사람을 챙기며 이 시대에 흔치 않은 너그러움을 보이기도 한다. 기홍은 어디선가 주워들은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신념으로 견지하기 때문이 아니라 본연의 선함 때문에 자기 트럭을 우그러뜨린 송하나를 용서하고 측은지심을 갖는다. 하나에게 아픈 데는 없냐, 어디서 지내는 거냐 묻고 택시비를 핑계로 합의금이나 다름없는 고깃값을 돌려주기도 한다. 하나가 개인정보를 함부로 캐묻는 사람들을 통렬히 비판하자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조심스레 언행을 수정하기도 한다. 그에게 더 나은 기회가 있었다면, 어떤 것이 옳고 바른 양식인지 알았다면 조금 덜 불편한 사람이 될 수도 있었을까 상상하게 되는 대목이다.

이제 비로소 기홍(이 대표하는 사람들)이 이해되는가? 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좋아지는가? 아니요.
그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가? 조금은.
그가 누군가에게 좋은 어른이었는가? 확실히.
 

언젠가부터 너무 무지해서 무례한 사람들의 속사정을 알아주지 않기로 결심한 채 살아왔다. 20대 여성인 내가 세상의 무례를 견디면서 그 이면까지 이해할 여력은 도저히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와 내 또래 여성들에게 가장 예의 없었던 사람, 인격적으로 하대했던 사람은 대체로 더 나이가 많은 남성이었기에 그들을 모조리 한데 묶고 적대하는 것으로 ‘우리’의 경계를 지켜왔다. 이미 충분한 발화의 기회를 얻어온 그들의 사연을 한 사람씩 뜯어보며 알아주기엔 너무 지치고 화날 따름이라서.

그런데 ‘괴인’에는 지겨운 항변이나 자기연민이 없다. 대신 ’그간 잊고 살았겠지만 여기도 사람이 있었답니다. 내가 그간 잘못한 것도 인정해요. 다만 여기에 나도 살아가고 있어요‘, 하는 묵묵하고 건조한 설명만 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하나 같은 사람들에게 기홍 같은 사람들이 보내는 초대장처럼 다가온다. 하나들과 기홍들에게 서로를 다 안다고 착각하지 말자는 상냥한 당부 같기도 하다.

극의 중반부, 그 어떤 쇼트도 이어지지 않고 영화의 시간적 흐름을 파괴한 한 장면이 있다. 두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굽이굽이 밤의 산길을 돌아 내려가는 그 장면은, 없어진 세입자 기홍과 부인 현정을 찾으며 초조해진 정환이 뜬눈으로 지새운 새벽보다 한참 전에 도착해 있다. 영화의 맥을 끊고 갑작스레 등장한 밤길의 두 사람이 하나와 기홍이란 건 결말에 가서야 알게 된다. 그 밤은 우리가 몰랐지만 이미 우리 옆에 와 있던 타인의 삶을 의미하는 것만 같다. 이 기묘한 화법은 단절을 찢고 세상을 다시 이어 붙여보려는 과감하고도 무심한 영화적 시도로 읽힌다.

영화 ‘괴인’ 스틸. ⓒ영화사 진진
영화 ‘괴인’ 스틸. ⓒ영화사 진진

영화를 보고 나오면 길가의 사람들이 달리 보인다. 지나가는 여자들을 빤히 쳐다보는 노인에게도, 이유 모르게 화난 아르바이트 노동자에게도, 아무에게나 중얼중얼 욕하는 버스 기사에게도 내가 모르는 삶이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온몸으로 느낀다. 모르기로 선택하면 미워하기 쉽고, 제대로 알게 되면 미워하기 어렵다는 사실도.

이렇듯 ‘괴인’은 기홍으로 대표되는 나와 가장 먼 이들을 일상적 사유의 자리로 끌어오는 일에 성공한다. 어떤 이는 기홍이 꼭 자기와 닮아서 민망해하며, 거울 치료를 받는 자세로 영화에 임하기도 했을 것이다. ‘괴인’은 이런 나와 그런 당신의 공생을 포기하지 않는 영화다. 다른 게 아니라 이것이 바로 영화가 시도할 수 있는 최대의 휴머니즘 아닐까.

회사원. 영화 읽고 책 보고 글 쓰는 비건 페미니스트. 브런치: https://brunch.co.kr/@yooh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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