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이용자 발끈하면 기업 굴복
정부당국 손 놓은 동안
힘없는 여성 창작자들 비방·해고 반복

시민사회단체들이 11월28일 경기 성남시 넥슨 사옥 앞에서 ‘게임문화 속 페미니즘 혐오몰이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넥슨 사옥 앞에 ‘2023년 노동법 사망을 애도한다’, ‘개인사상 검열 부당해고 규탄한다’라고 적힌 근조화환 9개가 놓였다. ⓒ이세아 기자
시민사회단체들이 11월28일 경기 성남시 넥슨 사옥 앞에서 ‘게임문화 속 페미니즘 혐오몰이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넥슨 사옥 앞에 ‘2023년 노동법 사망을 애도한다’, ‘개인사상 검열 부당해고 규탄한다’라고 적힌 근조화환 9개가 놓였다. ⓒ이세아 기자

기괴한 ‘페미니즘 사상검증’ 바람이 또 게임업계에 불어닥쳤다. 인기 게임 ‘메이플스토리’ 홍보영상에서 ‘집게 손’을 찾아낸 남성들이 항의하자 대형 게임사 넥슨은 지난 26일 영상을 비공개하고 사과했다. 하청업체 ‘스튜디오뿌리’도 사과하고 해당 작업자를 퇴출했다.

기업가치 수십 조에 달하는 대기업이 황당한 음모론을 앞세운 남성들의 억지에 휘둘려 힘없는 창작자의 결과물을 비방, 훼손하고 밥줄마저 끊는다. ‘세계가 사랑하는 K콘텐츠’의 이면에서 이런 비상식적이고 비인권적인 일들이 8년째 벌어지고 있다.

법은 멀고 해고는 가깝다. 게임 성우·일러스트레이터 등은 건별로 계약하고 일하는 프리랜서가 많아 노동법의 사각지대에 있다. 예술인권리보장법은? ‘민간 기업’이 권리를 침해한 경우엔 적용되지 않는다. 정부는 여성 배제적 게임업계 관행 실태조사마저 중단한 상태다. 게임업계의 성평등을 요구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속수무책으로 노동권과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다.

시민사회단체들이 11월28일 경기 성남시 넥슨 사옥 앞에서 ‘게임문화 속 페미니즘 혐오몰이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넥슨 사옥 앞에 ‘2023년 노동법 사망을 애도한다’, ‘개인사상 검열 부당해고 규탄한다’라고 적힌 근조화환 9개가 놓였다. ⓒ이세아 기자
시민사회단체들이 11월28일 경기 성남시 넥슨 사옥 앞에서 ‘게임문화 속 페미니즘 혐오몰이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넥슨 사옥 앞에 ‘2023년 노동법 사망을 애도한다’, ‘개인사상 검열 부당해고 규탄한다’라고 적힌 근조화환 9개가 놓였다. ⓒ이세아 기자

“힘없는 동료들이 자기 SNS에 여성 인권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지, 작업물의 작은 손동작이 문제 되진 않을지 걱정하며 자기 검열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비참하고 참혹합니다.” 정화인 전국여성노동조합 디지털콘텐츠창작노동자지회 사무장은 지난 28일 경기 성남시 넥슨 사옥 앞에서 열린 ‘게임문화 속 페미니즘 혐오몰이 규탄’ 기자회견에서 업계 현실을 들려줬다.

넥슨은 수년간 ‘게임업계 페미니즘 사상검증’에 동조해 온 대표적 기업이다. 2016년 자사 게임 ‘클로저스’ 여성 성우를 해고한 일이 시작이었다. 개인 SNS에 ‘메갈리아’ 후원 티셔츠를 입은 사진을 올렸다는 게 이유였다. 정 사무장은 “이후 많은 여성창작노동자가 부당한 일을 당했고 피해자들은 아직 심적 고통과 경제적 피해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했다.

김수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여성학협동과정 부교수는 “(넥슨이) 게임업계에 요구되는 사회적 가치와 공적 책무에 대한 고려와 숙고 없이 억지 민원에 바로 응답하면서 남성 게임 커뮤니티 이용자들의 효능감을 충족시켜 주고 있다”고 꼬집었다. 

게임업계 노동자 10명 중 8명은 “사이버 불링·사상검증, 직장 내 성차별 문제가 심각하다”고 느끼지만, 회사로부터 보호 조치를 받은 이들은 8.7%에 그쳤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청년유니온 등, 2023) ⓒ청년유니온
게임업계 노동자 10명 중 8명은 “사이버 불링·사상검증, 직장 내 성차별 문제가 심각하다”고 느끼지만, 회사로부터 보호 조치를 받은 이들은 8.7%에 그쳤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청년유니온 등, 2023) ⓒ청년유니온
넥슨 본사 앞 시민사회단체 시위 현장에서 ‘칼부림’을 하겠다는 협박 글이 지난 28일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와 경찰이 수사 중이다.  ⓒMBC뉴스데스크 방송화면 캡처
넥슨 본사 앞 시민사회단체 시위 현장에서 ‘칼부림’을 하겠다는 협박 글이 지난 28일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와 경찰이 수사 중이다. ⓒMBC뉴스데스크 방송화면 캡처

남초 게임 커뮤니티에서 태어나 기업이 키운 여성혐오가 현실의 폭력으로 번질 우려도 있다. 넥슨 본사 앞 시민사회단체 시위 현장에서 ‘칼부림’을 하겠다는 협박 글이 28일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와 경찰이 수사 중이다. 당일 현장엔 경찰 병력이 다수 배치됐다. 기자회견 직후 일부 안티페미 성향 유튜버들이 활동가들에게 몰려들어 충돌을 빚었다.

게임업계의 성차별·성희롱·사이버불링을 해결할 책임은 일차적으로 기업에 있다.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사업주는 악성 고객으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 국가인권위도 지난 2020년 기업들에 “게임 이용자의 부당한 종사자 퇴출 요구에 동조하지 않거나, 혐오표현 및 부당한 종사자 퇴출 요구에 적극 대응해 혐오의 확산을 방지하고 피해자들이 관련 업계에서 다시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라”고 권고했다.

기업의 인권존중 의무를 실행한 모범 사례도 존재한다. 게임사 클로버게임즈는 2020년 자사 게임 ‘로드 오브 히어로즈’ 여성 일러스트레이터에 대한 ‘페미니즘 사상 검증’ 요구를 받자 “개인의 사상과 관련한 문의에는 답할 수 없고, 특정 인구 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혐오에 대해 일체 반대한다”고 답했다.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김설 청년유니온 위원장이 지난 10월17일 국회 소통관 기자회견장에서 열린 게임업계 사이버불링, 성희롱 및 성차별 실태 기자회견에서 고용노동부의 특별근로감독을 촉구하고 있다.  ⓒ청년유니온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김설 청년유니온 위원장이 지난 10월17일 국회 소통관 기자회견장에서 열린 게임업계 사이버불링, 성희롱 및 성차별 실태 기자회견에서 고용노동부의 특별근로감독을 촉구하고 있다. ⓒ청년유니온

기업이 스스로 나서지 않는다면 정부가 나서야 한다. 청년유니온, 디콘지회, PM유저협회,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달 17일 국회에서 게임업계의 성차별·성희롱·사이버불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용노동부의 특별근로감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시민 1만2745명의 청원서가 담긴 박스도 국감장에서 노동부에 전달했다. 이날 노동부와 소속기관 서울·중부고용노동청 측은 “게임업계에 소홀한 점이 있었다”며 “노동자 보호를 위한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미뤄선 안 된다. 매년 같은 사태가 반복되는 업계 상황을 면밀히 들여다보고 전방위적인 피해 구제·시정 조치에 나서야 한다.

블리자드, 일렉트로닉 아츠(EA) 등 글로벌 게임사들은 이미 여성·성소수자 캐릭터와 임직원을 늘리는 등 ‘DEI’(다양성과 포용성) 가치를 반영해 나가고 있다. 동시대 한국 게임업계의 구태는 황당하다 못해 기괴하다. “한국 남성들이 남성적 감성에 대한 모욕감을 표현하기만 하면 기업들은 그들을 달래기 위해 허리를 굽히고 있다.” 2021년 뉴욕타임스 보도의 한 대목이다. 3년째 그대로인 현실이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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