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더하는 말풍선]

*이 글은 작품의 줄거리와 결말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난다 작가의 만화 ‘도토리 문화센터’ ⓒ카카오웹툰 제공
난다 작가의 만화 ‘도토리 문화센터’ ⓒ카카오웹툰 제공

난다 작가의 ‘도토리 문화센터’는 “자리”에 대한 이야기다.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동시에 깎아내리는 직장을 포기할 수 없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동시에 착취하는 가정을 저버릴 수 없는 중노년 여성들의 이야기다. 끝없는 집안일을 떠안지만 인정받지도 보답받지도 못하는 엄마, 할머니, 며느리, 딸의 자리. 야근을 자처하며 부당한 언사와 성희롱을 견뎌낸 후에도 승진은 남자 동료들에게 양보해야 하는 후발 주자의 자리.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했던가.¹ 있을 곳을 잃으면 존재 자체도 잃을까 쉬지 않고 노동하는 한국의 여성들에게 이보다 잘 어울리는 말이 있을까.

그럼에도 취미도 휴식도 없이 일만 보며 달려온 40세 여성 고두리는 질문하게 된다: “내가 일을 지켜내면 일도 나를 지켜줄까. 내가 나를 증명할 수 없을 때에도 자리를 내어줄까.” 그가 본부장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먼저, 중노년 시민들이 문화생활을 누리는 장소인 도토리 문화센터를 없애 대규모 쇼핑센터를 세울 부지를 사수해야 한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자리를 빼앗아야 하는 잔인한 미션이지만 두리는 마다하지 않는다. 비싼 땅은 돈 되는 일에 쓰여야 하고, 취미 생활은 돈이 안 되니까. 두리는 문화센터를 전략적으로 없애기 위해 신규회원으로 분해 문화센터를 지키는 네 명의 여성들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난다 작가의 만화 ‘도토리 문화센터’의 한 장면.  ⓒ카카오웹툰 제공
난다 작가의 만화 ‘도토리 문화센터’의 한 장면. ⓒ카카오웹툰 제공

하지만 센터 회원들을 알아갈수록 두리는 그들의 자리 역시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들고 만다. 문화센터에서 그들은 아줌마, 엄마, 할머니의 ‘전형’이 아닌 취향이 있고 욕망이 있고 독특하며 살아 있는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다. 진정으로, 자리는 ‘사람’을 만드는 데 필요하다. 딸, 엄마, 할머니가 아니라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하다. 나를 정의하는 모든 직책을 잃더라도 여전히 남아있는 잔여 – 남을 위해, 쓸모를 위해 만들어진 나를 제외한 나머지를 찾을 자리가 필요하다. 그 공간이 바로 도토리 문화센터다. 

난다 작가의 만화 ‘도토리 문화센터’의 한 장면.  ⓒ카카오웹툰 제공
난다 작가의 만화 ‘도토리 문화센터’의 한 장면. ⓒ카카오웹툰 제공
난다 작가의 만화 ‘도토리 문화센터’의 한 장면.  ⓒ카카오웹툰 제공
난다 작가의 만화 ‘도토리 문화센터’의 한 장면. ⓒ카카오웹툰 제공

작품의 두 번째 에피소드의 중심인물인 모미란은 취미와 취미를 누릴 수 있는 공간이 여성에게 미치는 긍정적인 변화를 가장 극적으로 경험한다. 남편은 집안일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숨 쉬듯 가스라이팅을 하며 미란의 동선과 행동을 평가하고 감시한다. 시어머니는 미란의 미용 기술과 재능을 아까워하는 척 자신의 돈벌이로 이용하려 하고, 아들과 공모해 미란의 명의로 된 땅을 빼앗을 계획까지 세운다. 미란은 갱년기 스트레스로 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고 무력감과 고립감에 휩싸여도 집안 화장실로 도피해 가만히 혼자 앉아있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도망치듯 장을 보러 간 마트에서 우연히 트로트 아이돌의 공연을 보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미란은 문화센터 갱년기 극복 수업을 함께 듣는 회원들과 팬덤활동, 이른바 ‘덕질’을 시작한다. 그들에게 도토리 문화센터는 “안전기지 같은 곳”이다. 센터 카페에 앉아 굿즈를 만들고, 자부심과 즐거움이 가득한 대화를 하며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반짝거리는 아이돌을 보며 자신 역시 “지지 않고 빛나는 사람이고 싶”다며 다시 미용사의 꿈을 꾸게 된다. 

난다 작가의 만화 ‘도토리 문화센터’의 한 장면.  ⓒ카카오웹툰 제공
난다 작가의 만화 ‘도토리 문화센터’의 한 장면. ⓒ카카오웹툰 제공

덕질 자체가 그를 둘러싼 남편과 시모의 음모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덕질은 중년의 나이에도 새 친구를 사귈 수 있음을 깨닫게 했고, 지도 앱을 사용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했다. 집에서는 목소리도 제대로 낼 수 없을 정도로 위축되었던 그가 콘서트에서 아주 크게 소리칠 수 있었던 것은 억압된 욕망의 분출이자 자기 긍정의 시작이다. 집 바깥으로 발을 내디딜 적극성과 몰랐던 세계로의 문을 열어볼 용기가 받아들여지는 공간인 도토리 문화센터가 있었기에, 모미란은 가족이라는 족쇄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할 힘을 기를 수 있었다.²  

취미, 문화센터, 덕질. 나잇값 못한다는 편견과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한다는 비난에도 억척스럽게 그것을 지켜내는 이유는, 누구의 소유물도 보호자도 어머니도 딸도 감정 쓰레기통도 아닌,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자신이 되고 싶은 것으로 채워진 주체가 될 장소가 절실하기 때문이다. 공공도서관이 줄줄이 폐관되고 여성 문화 공간이 하나둘 문을 닫을 때, 사실은 우리가 ‘사람’으로 살아있을 자리 역시 조금씩 삭제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삭제되는 자리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면, 그저 살아남느라 나로 살아가는 방법을 망각한 채 나이 들어가고 있다고 느낀다면, 두리가 그랬듯 우리도 ‘도토리 문화센터’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³ 

난다 작가의 만화 ‘도토리 문화센터’의 한 장면. ⓒ카카오웹툰 제공
난다 작가의 만화 ‘도토리 문화센터’의 한 장면. ⓒ카카오웹툰 제공
난다 작가의 만화 ‘도토리 문화센터’의 한 장면.  ⓒ카카오웹툰 제공
난다 작가의 만화 ‘도토리 문화센터’의 한 장면. ⓒ카카오웹툰 제공

 

참고문헌

¹ 본래는 “사람이 어떤 직위에 있게 되면 그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변하게 마련이라는 말”을 뜻한다. https://ko.dict.naver.com/#/entry/koko/e0eb80bb3bc745ec83395f5dc7555ea6.

² 팬덤활동이 중장년 여성의 자아존중감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자아가치 확립에 도움을 준다는 연구 역시 이루어진 바 있다. 윤수원. ‘어른들의 덕질: 준사회관계 기반 팬덤활동이 중장년 여성의 자아존중감에 미치는 영향 – 가수 ‘임영웅’과 팬클럽 ‘영웅시대’를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미디어 대학원, 2023, 석사학위논문. 

³ 난다. ‘도토리 문화센터.’ 카카오웹툰, 2023. https://webtoon.kakao.com/content/도토리-문화센터/2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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